최초의 경제계획가, 보은출신 어윤중

2010.03.14 16:17:04

조혁연 대기자

개화기 정치인 어윤중(1848~1896)의 고향이 충북 보은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는 경기도에서 태어났으나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은군 삼승면 선곡1리 가마실 마을에서 보냈다. 이는 그의 조부 어명능이 지금의 남양주시에 거주하고 있던 정약용과 친구였던 점에서 어느 정도 입증되고 있다.

어윤중이 중앙 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29살 때 전라도 암행어사로 나간 것이 계기가 됐다. 전라도를 둘러본 후 그가 올린 보고서에는 '도량형 통일이 절실하다' 등의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것이 고종의 눈에 띄면서 그는 측근신하로 성장한다.

그는 동학과 관련해서도 '명해석'을 했다. 1893년 고향인 보은에서 대규모 동학집회가 열리자 고종은 어윤중을 '순무사'로 파견한다. 순무사는 변란 등이 발생했을 때 지방에 파견된 임시관직을 말한다. 신립장군도 순무사 자격으로 충주 탄금대 전투를 수행한 바 있다. 이때 그는 동학도에 대해 처음으로 '민당'(民黨) 즉 '백성의 무리'라는 표현을 쓰게 된다. 종전까지 당시 조정은 '비도'(匪徒) 즉 '나쁜 무리'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는 동학도의 주장에 상당부분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동학에 대한 그의 선의는, 그의 죽음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후 그는 탁지부 대신에 임명돼 여러 가지 경제개혁을 시도한다. 그는 고종에게 경제개발 방법으로 차관 유치, 거대 민간자본 육성 등을 제시했다. 그는 국내에서 화폐를 마구 찍으면 통화팽창 우려가 있고, 또 당시 일본 미쓰이 물산과 같이 국내 산업을 선도할 민간기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를 한국 최초의 경제 계획가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이런 생각은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전략과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고 있다. 박정권은 경제개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과 수교, 6억달러 정도의 유무상 차관을 들여왔다. 또 거대 민간자본이 국내 산업을 선도하는 것이 경제개발을 크게 앞당긴다고 판단, 재벌에게 여러 특혜를 줬다. 이른바 '불균형 성장론'이다.

이것이 옳은 정책 방향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70여년 전 어윤중이 이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어윤중은 아관파천 사건후 경기도 용인에서 한 향반에게 살해된다.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개혁파들은 일본으로 피신한다. 반면 어윤중은 해외로 피신하지 않고 자신의 고향이면서 또 자신이 '민당'으로 불렀던, 동학도가 있는 보은으로 내려가게 된다.

그러나 용인 어비리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산송 문제로 원한을 갖고 있던 정원로라는 향반에게 살해당한다. 그때 그의 나이 49살이었다. 조선 전기에는 노비와 관련된 소송이 많았으나 후기에 들어서면 묘지를 둘러싼 소송, 즉 산송이 급증했다. 그도 그것의 희생양이 됐다. 고종실록은 이 사건에 대해 '정원로에게 처음에는 교형(絞刑)이 내려졌으나 이후 추자도 5년 유배형으로 감형됐다'고 적고 있다. 현 안국약품 대표이자, 남부3군 국회의원을 지낸 어준선씨가 그의 가까운 친척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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