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숙주 영정, 청원에 2개인 까닭

2010.06.07 19:03:23

조혁연 대기자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 영정은 전국적으로 3개 존재하고 있다. 우리고장 청원군 가덕면 인차리 구봉영당(보물 제 613호), 낭성면 관정리 묵정영당(충북도 유형문화재 제 108호), 경기도 평택시 청북면 고잔리(도향토유적 제 6호) 등이다. 3개의 영정은 일종의 母子 관계에 있다. 묵정영당과 평택 고잔리 등 나머지 2개 영정은 구봉영당 것을 모사했다. 따라서 구봉영당 영정이 일종의 '원본'인 셈이다.

신숙주 영정은 단순한 초상화가 아닌, 시대적 정보를 담고 있다. 우선 조선시대 초상화 가운데 흉배(胸背)가 처음 보이고 있다. 흉배는 조선시대 왕, 왕세자, 문무백관 관복의 가슴과 등에 장식한 표장(表章)을 일컫는다.

이 문양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정해졌다. 대군은 기린, 문신 1품은 공작, 2품은 운학(雲鶴), 3품은 백한(꿩과 비슷한 새)을, 무신 1 ·2품은 호표(虎豹), 3품은 웅표(熊豹)의 표장을 붙이도록 했다. 따라서 3품(당상관) 이상만 가슴(흉)과 등(배)에 표장을 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숙주 영정에 등장하는 흉배의 문양은 구름과 기러기, 즉 운안(雲雁)이다. 이로 미뤄 문관 2품 때의 문양임을 알 수 있다. 신숙주가 문관 2품에 오른 것은 1445년 좌익공신책록 때이다. '좌익공신'은 단종을 퇴위시키고 세조를 즉위케 하는 데 공을 세운 인물들에게 내린 공훈을 일컫고 있다. 궁궐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술이 두어 순배에 이르렀을 때 임금이 궁인(宮人)을 불러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말하기를,

"내가 이에 경들을 사랑하는 뜻을 표시하고, 또 즐겁고 흡족함을 다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공신들이 번갈아 일어나서 헌수(獻壽)를 올려 극진히 즐기다가 파하였다'.(세조실록) '헌수'는 큰 잔치 따위에서, 주인공에게 장수를 비는 뜻으로 술잔을 올리는 것을 말한다. 달리 상수(上壽)라고도 한다.

영정 왼편에는 '성묘을미공졸후칠십오년을사개장'(成廟乙未公卒後七十五年乙巳改粧)이라는 문장이 적혀 있다. 이로 미뤄 1475년(성종 6)에 다시 한번 손질했음을 알 수 있다. 신숙주 영정이 전국적으로 3개나 존재하는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전회에 잠깐 언급했지만 신숙주는 8명의 아들을 뒀다. 이중 4째 신정(申瀞·고천군), 5째 신준(申浚·소안군), 7째 신동(申洞·영성군)의 후손들이 청원 낭성, 가덕, 미원면 등에 집중적으로 세거하게 된다.

신숙주 영정이 청원군에만 2개 존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평택은 봉예공파이다. 고천군파 후손은 세거하던 가덕면 인차리에 1895년(고종 32) 영정을 보존하기 위해 구봉영당을 세웠다. 영성군파 후손도 1888년 신숙주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묵정영당을 세웠다. 필법상 이곳의 신숙주 영정은 그 후에 구봉영당 것을 모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청원의 고령신씨(일명 山東신씨)는 향촌사족으로 승승장구 했다. 그러나 신숙주 11대 손인 신천영(申天永)이 이인좌난에 가담하면서 몰락했다. 구한말 3대 천재의 하나인 단재 신채호가 중앙 고위관리로 진출하지 못하고, 아웃사이더가 된 끝에 독립운동가 길을 걷게 된 원인도 일부 여기서 찾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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