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양촌에서 명저를 쓰다, 권근

2010.06.20 18:09:14

조혁연 대기자

권근(權近·1352~1409)은 유배생활의 외로움을 저술로 달랬다. 조선시대 유교 사상사를 논할 때 반드시 거쳐햐 할 저서가 있다. 바로 권근이 지은 '입학도설'(入學圖說)과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이다. 보물 제 1136호인 입학도설은 권근이 익주(지금의 익산)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저술한 책으로, 일종의 성리학 입문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일부 내용은 책 제목 그대로 도설(圖說), 즉 그림설명을 달아 이해도를 높였다.

'오경천견록'은 유배지 충주 양촌에서 1391년(공양왕 3) 저술작업을 시작한 책으로 14년 만에 완성됐다. 그 사이 왕조가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뀌었다. 유교의 근본경전인 5경, 즉 역경, 서경(書經), 시경, 예기, 춘추를 주석한 이 책은 '역(易)'을 본체(體), 춘추를 용(用)으로 인식했다. 서거정과 안정복이 권근의 두 저서를 이례적으로 호평했다.

'경은 천품이 순수하고 지식이 깊었다. 학문에 있어서는 육경(六經)을 모조리 꿰뚫어 전성(前聖)의 오묘한 이치를 발명하고 후진의 사표가 되었으며, 오경천견록·입학도설 등의 저술은 학자들의 지남(指南)이 되었다'.(서거정의 동문선) 이때의 '지남'은 이끌어 가르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권근은 적소(謫所)에 있으면서 입학도설을 짓고, 이듬해에 충주(忠州) 양촌으로 돌아가 오경천견록을 지었다. 권근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고, 이색·정몽주의 문하에 출입하였으며 문장과 학술이 당세에 으뜸이었다'.(안정복의 동사강목) '적소'는 유배지와 같은 말이다.

권근이 역저 '오경천견록'을 지은 곳은 유배지 충주 양촌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와 관련, 충주에서 양촌이라는 지명을 찾으면 '충주시 앙성면 영죽리'와 '소태면 양촌리' 등 두 곳이 등장한다. 현재 두 곳 중 어느 곳이 권근이 유배생활을 한 곳인지 잘 고증되지 않는다. 다만 권근 후손은 소태면 양촌리를 이구동성으로 지목하고 있다. 양촌은 권근의 호이기도 하다. 목은 이색(李穡·1328~1396)이 이때의 권근 모습을 '양촌부'(陽村賦)라는 시로 남겼다.

'/…/ 양촌 권공이로세 / 널리 만수를 관찰하고 / 요약하여 일중에 이르렀네 / 조심조심 이를 지키어 / 내 몸을 재계하네 / 멀지 않아 회복되어 / 그 끝이 면면히 잇네 /…/'. 이때의 '권공'은 권근을 일컫는다. 권근은 말년에 병을 자주 앓은 것으로보인다. 태종 이방원이 인편에 음식을 보내 그의 쾌차를 기원한다.'

'공조 판서 이내(李來)·우부대언 윤향(尹向)을 보내어, 궁온·건장·생장과 생선을 권근에게 하사하였다. 그때에 권근이 아직도 복제(服制) 중에 있었는데, 오래도록 병이 낫지 아니하였던 까닭으로 육선(肉膳)을 하사한 것이다'.(태종실록) 본문 중 궁온은 임금이 내려주는 술. 건장은 말린 노루고기, 생장은 생노루고기를 의미한다.

권근은 임종에 앞서 유언을 남긴다. 반불교 성향이 골수에 박혀있음을 알 수 있다. '장차 임종하려 할 때에 아들과 사위를 불러 모아 놓고 유명(遺命)으로 불사(佛事)를 쓰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아들과 사위들이 치상(治喪)을 일체 가례대로 행하고 부도법(浮屠法)을 쓰지 아니하였다고 한다'.(태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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