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과 달리 이성계 손을 잡다, 권근

2010.06.21 20:09:19

조혁연 대기자

고려말 유학자인 정몽주, 이색, 길재 등을 가리켜 흔히 '삼은'(三隱)이라고 한다. 세 사람의 호는 각각, 포은(圃隱), 목은(牧隱), 야은(冶隱) 등으로, 모두 '숨을 隱' 자로 끝난다. 여기에 고려왕조에 대한 절개를 지켜, 태조 이성계의 조선개국에 협조하지 않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때 지어진 한시가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보니 /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네 /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길재) 정몽주와 길재는 그 출생지가 영남이다. 정몽주는 영천, 길재는 금오산 인근의 선산이다. 따라서 이들은 훗날 조선 영남사림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게 된다.

영남 사림은 그 시작을 '절개'로 했듯이 항상 대의와 명분을 중시했다. 당연히 두 왕조를 섬기는 것을 충이 아닌 변절로 봤다. 권근이 그 중 한 명으로 지목됐다. 권근은 이색을 스승으로 모셨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스승과 제자가 각기 다른 길을 간 셈이 됐다. 이는 세조대의 신숙주와 비슷한 일면이 있다. 때문에 당시 각종 야담집은 권근을 부정일색으로 기술하고 있다.

'신광한의 집에 공의 초상이 있었는데, 김안국은 절을 하면서, "이 분이 우리 도(道)에 공이 있다" 하였고, 송인수는 절을 하지 않고, "이 사람은 절개를 못 지킨 사람이다" 하였다.(해동문헌록)

'이미 항복한 뒤에 지위는 삼사(三司)에 지나지 않고, 60도 못살았으니, 소득도 적었다. 오직 자손 대대로 고관이 끊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번성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양촌, 양촌' 하여 덕행이 있는 것 같이 여기니, 심하다, 그 명성을 도적질함이여'.(상촌휘언) 이때의 '항복'은 변절의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권근과 이성계의 관계는 '어떤 흥정'이 아닌, 인간적인 면에서 싹튼 것으로 여겨진다. 실록에는 권근이 이성계를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는 대목이 자주 나온다. 시점은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하기 이전이다.

'경오년 봄에 대간에서 다시 논핵하여 극형에 처하려고 하였으나, 태조가 구원하여 줌에 힘입어 장(杖)을 맞고 흥해(興海)로 양이(量移)되었다'.(태조실록) 권근은 명나라에서 온 외교문서를 먼저 뜯어본 죄로 극형에 처해질 위기에 놓였다. 이를 감형시켜준 사람이 본문의 '태조', 즉 이성계다.

'전조 말엽에 몸이 중한 죄를 입어 거의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뻔하였는데, 다행히 전하의 불쌍히 여기시는 인덕에 힘입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고, 이제 국초를 당하여 또 거두어 써 주시는 은혜를 입었습니다"하니 (…) 태조가 남몰래 황금(黃金)을 하사하여 행자로 쓰도록 하였다.(태조실록)

이른바 표전문 사건(전회 참조)으로 사신 정총(鄭摠·1358∼1397) 일행이 명나라에 억류되자 권근이 자진해서 이를 해결하겠다고 나서는 내용이다. 이성계가 노자로 쓰라고 황금을 몰래 준 것으로 돼 있다.

권근은 그의 문집 양촌집에서 '고려의 국운은 공민왕에서 끊겼고, 창왕 이후는 왕씨가 아니라'는 논리를 전개했다. 이는 후인들에게 곡필이라는 평을 받았다.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으나 분명치는 않다. 문집에 등장하는 '양촌'은 그가 유배를 당했던 충주 소태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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