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국공신 '남은'과 청주 봉명동

2010.06.28 18:22:18

조혁연 대기자

고려말 신진 사류의 한 인물로 남은(南誾·1354~1398)이 있다. 정도전 사람인 그는 정몽주가 이끄는 구세력과 대립했다. 신진 사류가 혁명을 추구했다면, 정몽주가 중심이 된 구세력은 고려 왕조를 유지하면서 점진적인 개혁을 원했다. 따라서 남은은 정벌군에 포함돼 위화도까지 진군했지만 계속 요동 정벌을 반대했다. 급기야 전회에 밝힌 조인옥(趙仁沃·1347~1396)과 함께 우군통제사 이성계에게 회군할 것을 진언한다.

위화도 회군이 일어난지 4년만에 조선이 개국됐다. 그는 개국공신 1등에 책록돼 전지 2백결과 노비 25구를 받았다. 이는 정도전과 같은 규모다. 천도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됐다. 실록은 정도전과 함께 남은도 한양천도에 적극 관여했음을 보여준다. 이성계는 먼저 계룡산 일대를 둘러본다.

'남은이 아뢰기를, "신 등이 외람히 공신에 참여하여 높은 지위에 은혜를 입었사오니, 비록 새 도읍에 옮기더라도 무엇이 부족한 점이 있겠사오며, 송경(松京)의 토지와 집은 어찌 아까울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이 행차는 이미 계룡산에 가까이 왔사오니, 원하옵건대, 성상께서는 가서 도읍을 건설할 땅을 보시옵소서" 하였다'.(태조실록)

이성계는 계룡산 다음으로 경기도 광실원 일대를 둘러본다. 광실원은 지금의 양주 일대를 말한다. 그런데 새 도읍지를 물색하러 나갔다가 대낮에 뜬금없이 술판이 벌어진다. 사관의 의도된 작문인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이성계의 인간적인 면모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임금이 광실원(廣實院) 동쪽에 이르러 양원식이 말한 도읍할 만하다는 곳을 보았는데 모두 좋지 못하다고 말하여 그만두고, 장단 나루에 이르러 다락배를 타고 노니, 재상들과 노인들이 모두 헌수하였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검교 시중 남을번(南乙蕃)이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니, 임금이 남은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경은 부모가 모두 계시고 몸이 재상이 되었는데, 나는 비록 오늘날 일국의 임금으로 귀하게 되었다 해도 어찌 경에게 미치겠는가" 하고서 흐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물을 따라 내려와 아래 여울 가에서 유숙하였다'.(태조실록)

조선개국 6년만에 제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이방원은 8남 방석을 세자로 추대하려는 정도전 일파를 살해했다. 일파에는 남은도 포함돼 있다. 그러자 항간에 다음의 동요가 떠돌았다.

'우리 태종조에, "저 남산에 가서 돌을 쪼으니 정(釘) 남은 것이 없다."는 동요가 있었다. 정이란 것은 돌을 쪼는 연장으로서 정(釘)과 정(鄭)의 음이 서로 같고, 나머지 자는 남은과 음이 서로 같은데 얼마 후에 남은과 정도전이 주사되었다'.(연려실기술)

청주 봉명2동 백봉산 자락에 강무사당이 위치한다. '강무'(剛武)는 남은의 시호다. 일설에 의하면 1차 왕자의 난 때 부인 강릉김씨가 손자 남장을 안고 우리 고장 진천으로 도피했고, 그후 10세손인 남홍이 400년전 청주 봉명동에 입향했다. 그러나 남은의 묘가 용인시 남사면 창리에 위치하고 있는 것에서 보듯, 그 사실 여부는 분명치 않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강무사당을 청주지역 의령남씨의 현달용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남재희 전 국회의원, 남상우 청주시장, 남기창 전 청주대교수 등이 의령남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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