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를 거부하다, 청주옥 이색

2010.07.01 18:52:40

조혁연 대기자

이색(李穡·1328~1396)은 고려가 망했음에도 끝까지 지조를 지켜 삼은(三隱)의 한 명으로 불린다. 이색과 이성계는 처음에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이성계가 동북면 도지휘사가 되어 여진족을 정벌하러 나가자 이색이 시를 지어 전송한다.

'송헌(松軒)의 담기가 무신을 뒤덮으니 / 만리장성이 한몸에 맡겨졌네 / 분주하면서 몇 번이나 다사한 시기를 지냈던고 / 돌아오면 함께 태평한 날을 즐길 것이네(…)'(태조실록) 본문 중의 '송헌'은 이성계를 지칭한다.

위화도 회군후 두 사람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조민수와 이색은 우왕을 옹립, 즉위하게 했다. 이는 이성계 일파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의도와 달리 이성계 일파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이색은 고난의 길을 걷게 된다. 이때부터 유배와 복권이 반복된다. 1389년 오사충(吳思忠)의 상소로 장단에 유배, 이듬해 함창으로 이배됐다. 1391년에 석방되어 한산부원군에 봉하여졌으나,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되자 금주(衿州)로 추방됐다가 여흥·장흥 등지로 유배된 뒤 석방됐다.

이성계가 이색을 완전히 외면하거나 버린 것은 아니었다. 무신 이성계는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 즉 학구적인 요소를 이색에게 찾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색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곡식을 내려보내고, 또 한산백(韓山伯)에 봉하여 벼슬길에 나올 것을 종용한다. 그러나 이색은 끝내 이성계 사람이 되기를 거부하고 산천경계를 유람한다.

'태조가 말하기를,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노니, 덕이 적고 우매하다고 해서 버리지 마오" 하거늘 공이 말하기를, "망국의 대부는 보존하기를 도모하지 못하오. 다만 마땅히 나의 해골을 가져다가 고산(故山)에 묻을 뿐이요" 하고, 드디어 나가 버렸다'.(연려실기술) 이때의 '공'은 이색을 지칭한다.

그러자 태조 이성계는 이색이 자유인이 되는 것을 방임하고, 이색은 유유자적하던 중에 생의 마지막을 맞는다. '을해년(1395)까지 한산ㆍ여주ㆍ오대산에 출입했는데, 태조가 옛 친구의 예로 대접하여 공이 가고 싶은 곳에 가도록 맡겨 두었다. 병자년(1396) 5월에 태조에게 청하여 여강(驪江·여주)에 피서하러 갔다가 배에 오르자 갑자기 죽었다'. (연려실기술) 정도전 등 고려말 신진사류는 불교를 싫어하다 못해 경멸했다. 이색은 달랐다. 그는 유교의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하고자 한 유연한 사고의 소유자였다. 태조실록 내용이다.

'정총이 아뢰었다. "전하께서 어찌 불사(佛事)에 정성껏 하십니까. 청하옵건대, 믿지 마옵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이색은 유학의 종사(宗師)가 되었는데도 불교를 믿었으니, 만약 믿을 것이 못된다면 이색이 어찌 이를 믿었겠는가". 정총이 대답하였다. "이색은 세상에서 학식이 높은 선비가 되었는데도 남에게 비난을 받는 것은 진실로 이것 때문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이색이 도리어 그대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말인가. 다시 말하지 말라".

청주 주성동에 목은영당이 위치하고 있다. 목은은 한산(지금의 서천) 사람이다. 그럼에도 청주에 영당이 위치하는 것은 목은이 한때 청주옥(지금의 중앙공원 일대)에 갖힌 사건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진천 이월에 이색의 후손인 한산이씨가 많이 거주한다.


이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

<저작권자 충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PC버전으로 보기

충북일보 / 등록번호 : 충북 아00291 / 등록일 : 2023년 3월 20일 발행인 : (주)충북일보 연경환 / 편집인 : 함우석 / 발행일 : 2003년2월 21일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무심서로 715 전화 : 043-277-2114 팩스 : 043-277-0307
ⓒ충북일보(www.inews365.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by inews365.com, I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