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의 사위된 몸으로 귀양, 진천 이백강

2010.07.11 18:21:51

조혁연 대기자

진천인물 이거이(李居易·1348~1412)는 두 아들을 부마(駙馬), 즉 임금의 사위로 만들었다. 맏아들 이저(李佇)는 태조의 맏딸 경신공주에게, 둘째 아들 이백강(李伯剛)은 태종의 맏딸 정순공주에게 장가들었다.

조선 초기의 강력한 외척이 우리고장 진천에서 출현한 셈이다. 인지상정상 이거이는 우쭐하는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이 우쭐함이 이거이 3부자를 곤경에 빠트린다. 이거이가 사병해체 조치를 바로 이행하지 않자 대신들이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다.

'여러 절제사가 명령을 듣고 병권(兵權)을 즉시 삼군부에 바쳤는데, 오직 거이와 저(佇)만이 병권을 그대로 잡고서 즉시 송납(送納)치 아니하였다. 이에 판의흥삼군부사 이무(李茂) 등이 임금께 아뢰기를, "거이 부자가 병권을 내놓기를 아깝게 여기오니, 뜻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태종실록>

'감히 내가 임금의 사돈인데'라는 마음을 갖고 있던 이거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갔다. 실록이 이 부분을 매우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의정부에서 상소하였다. "이거이 부자가 원훈대신으로 종실에 연인하여 주상의 은혜를 지나치게 입었으나, 두 마음을 가졌으니, 죄는 참으로 큽니다. 원하건대, 삼성(三省·의정부)의 청한 바에 의거하여 그 죄를 밝게 바루도록 하소서"'-<태종실록>

실록은 본문 '두 마음'에 대해 '이거이가 임금을 업신여기고 또 어떤 변이 일어나기를 바랬다'고 적고 있다. 불경죄가 추가된 것이다. 태종이 이 대목에서 인간적인 고민을 한다. 이백강이 자신의 사위이기 때문이다.

'임금이 이백강을 머물러 두고 차마 갑자기 내보내지 못하니, 대간에서 정쟁(廷諍)하였다. "이미 이백강을 폐하여 서인으로 삼아 외방에 안치하게 하고, 여러 날 내보내지 아니하니, 신 등은 결망(缺望)합니다. 원하건대, 전하는 신의를 잃지 마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이백강은 마땅히 궁주(宮主)와 더불어 돌아가야 하므로, 그 거처하는 곳을 수즙(修葺)시킨 뒤에 이를 보내려고 한 것이다"'-<태조실록>

본문 중 '정쟁'은 간언 , '결망'은 원망, '수즙'은 보수와 같은 말이다. 이거이 부자의 사병혁파 반대 사건은 이후 태종이 사위를 정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태종은 이때 좋은 문벌의 아들을 부마로 삼는 것이 국정 운영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다음은 태종이 독백처럼 하는 말이다.

'대개 부마가 되는 자는, 가난하고 천한 것은 우려할 바 아니다. 문벌이 좋은 집 자손은 교만과 사치에 젖어 실패하지 않은 자가 드물기에 나는 벼슬이 낮은 사람의 자손을 취하려는 것이다. (…) 아버지가 죄가 있는데 아들이 부마가 된 경우, 그 이상 난처한 일이 없다'.-<연려실기술>

본문중 아버지는 이거이, 아들은 이백강을 일컫는다. 1년 후 유배지에서 풀여난 이백강은 태종을 잘 보필한 것으로 보인다. 사관이 이례적으로 좋은 평을 남기고 있다. '청평위 이백강이 졸(卒)하였다. (…) 남이 주는 것도 받지 않고, 사사로이 남에게 구하는 것도 없었다. 작은 정자를 짓고 주위에 화초를 심어 소요하면서 스스로 즐거워하는 것을 하루의 일로 삼았으므로, 부마 중에서 청렴하고 근면하다고 일컬었다'.-<문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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