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백두대간 재넘이문화 - 조선통신사길

"잿길이 진흙이어서 말발굽이 자주 빠지므로…"
백두대간 재넘이 문화2- 조선통신사길
충주 전별잔치, 비용많자 청주목에서 보조
거의 수안보 숙박-용추 점심-문경 숙박 順
민폐 의식해 商路는 상하행 모두 이용안해
가족보고픈 마음, 귀로에는 사행록 잘안써

2012.05.14 19:32:36

조선은 중국에 대해서는 '섬김'(事大)을, 일본에 대해서는 '친선'(交隣) 정책을 취했다. 조선은 이같은 방침에 따라 임진왜란 전에 4회, 임란 후에 12회 등 총 16회 정도의 통신사를 일본에 정식으로 파견했다.

이들 조선통신사들은 귀국후 한반도 안에서의 하행길(부산방향)과 상행길(복로·서울방향) 그리고 일본에서 겪은 경험담을 다양한 제목의 일기글로 남겼다.

조선시대 사신, 포로, 표류 등으로 인해 일본을 내왕한 사람의 경험담을 하나의 책으로 만든 것으로 '해행총재'(海行摠載)가 있다. 여기에 조선통신사들의 일기문이 대거 수록돼 있다.

민족문화추진회가 1974~1981년에 걸쳐 국역했다. 따라서 일반인의 접근도 가능하다.

해행총재에는 총 22개의 조선통신사 일기글이 실려 있다. 어떤 규칙을 갖고 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 산문 등 각기 다른 형태의 일기글이 실려 있다.

이중 그날그날의 행로(行路) 복원이 가능한 것은 일본행록(송희경·1420), 해사록(경섬·1607), 동사록(강홍중·1624-1625), 병자년 해사록(김세렴·1636-1637), 동사록(조경·1643) 등이 있다.

이밖에 계미동사일기(미상·1643), 부상록(남용익·1655-1656), 동사일록(김지남·1682), 동사록(홍우재·1682-1683), 해유록(신유한·1719-1720), 해사일기(조엄·1763-1764) 등 12개다. <괄호안, 저자와 일기를 쓴 해>

최종 목적지가 일본이기 같은 제목이 더러 있다. 일본으로 가는 한반도 하행길 여정은 편의상 경기도 구간, 충주-문경 구간, 문경 이남 구간으로 나눌 수 있다.

1872년 지도로, 조선통신사 일행은 대개 온정(지금의 온정리)-안보역(지금의 안보리)-소조령-조령관 순으로 백두대간 재넘이를 했다. 계립령(하늘재)도 지도에 보이나 公路로는 이용되지 않았다.

분석 결과, 조선통신사가 경기도 구간에서 가장 많이 경유한 하행길은 양재역-용인-양지-죽산 코스인 것으로 나타났다. 해사록, 동사록(강홍중) 등 대부분의 통신사가 이 코스를 택했다.

반면 '병자년 해사록'의 저자 김세렴은 처음부터 남한강 물길을 타고 하행하는 한강-신천-수정촌-앙덕촌-죽산-이포-양화포-강천-흥원-원주-구래촌-목계 행로를 택했다. <표참조>

그러나 이는 부사 김세렴(金世濂)의 개인 사정인 '근친'(覲親)에 의한 것으로, 충원(忠原·충주)부터는 관례 행로로 복귀했다. 근친은 가까운 친적을 찾아뵙는 것을 말한다.

통신사 일행이 충청도 경계 안으로 들어오면 이를 운송하던 경기도 말(馬)은 지금의 장호원이나 수안보 쯤에서 돌아가고, 충청도 말이 그 임무를 넘겨받았다.

조선통신사 일행은 충주~문경 경로에서는 거의 대부분 무극-숭선(혹은 용안)-단월-충주-수회-안부역-조령(일명 새재)을 재넘이 해 문경에 도달했다.

따라서 양재역-용인-양지-죽산-무극-숭선(혹은 용안)-단월-충주-수회-안부역-조령-용추-문경 코스가 관례이자 공식적인 사행로가 되다시피 했다.

조선통신사 수안보 부근에서의 숙식

12개 사행록 중 강홍중 동사록, 병자년해사록, 동사일록, 동사일기, 해유록 등 5개 일기가 이 구간에서의 숙박과 식사 과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적어놨다. <표 참조>

통신사 일행은 큰 변수가 없는 한 '안부역-숙박', '용추-점심', '문경-다음날 숙박' 등의 일정으로 움직였다. 다만 강홍중 동사록은 '수교촌-숙박', '용추-점심'. '문경-다음날 숙박'의 행로를 잡았다.

용추는 조령 동쪽사면의 지명을 말한다. 병자년해사록은 '충주 달구리-숙박', '연풍-점심', '견탄-다음날 숙박' 등의 일정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이는 통신사 수뇌부의 개인 사정에 의한 것으로, 다음 숙박지에 이르러서는 '관례 행로'로 복귀했다.

통신사 일행이 남행중 첫번째로 만나는 큰 고개는 백두대간 조령(鳥嶺·새재)이다. 조령의 북쪽으로는 계립령(하늘재), 남쪽으로는 이화령이 위치하고 있다.

조선통신사 백두대간 조령 재넘이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신사 일행은 백두대간 영로를 재넘이 할 때 만큼은 거의 대부분 조령을 택했다. <표 참조>

동사일록, 병자년해사록 등은 문헌 누락 등으로 재넘이 장솔를 알 수 없으나 정황상 조령을 경유했음이 분명해 보인다.

이처럼 통신사 일행이 조령만을 고집한 것은 속칭 '영남대로'가 부산 방향으로 가는 국가 공로(公路)였기 때문이었다.

조선통신사는 여정에 따른 각종 인력, 마필, 장비, 숙박, 음식물 등을 경유하는 각 고을로부터 제공받았다.

그렇지 않고 공로를 벗어나 상로(商路·일명 보부상길)를 택할 경우 민폐가 발생할 여지가 많았기 때문에 통신사는 의도적으로 이를 기피 했다.

조선통신사길 지도이다. 통신사는 대략 4백명 안팎으로 구성됐고, 최종 목적지는 에도(지금의 도쿄)였다.

통신사가 일본으로 가는 여정에는 4번의 전별 잔치가 수안보, 안동, 경주, 동래 등에서 공식으로 베풀어졌다.

그러나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2개 고을이 공동 주최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강홍중의 동사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도사(都事)가 연향을 대청에 베풀어 정사(正使) 이하 여러 군관이 모두 참석하였다. 이 연향은 충주에서 판비를 담당하고, 청주(淸州)에서 보조했다 한다. 충청도 인마는 이곳에서 교체되어 돌아갔다.'-<1624년 8월 28일>

조령은 해발 650m 정도로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안부(鞍部·고갯마루) 부근은 비교적 경사도가 심하다.

따라서 조령을 넘는 과정에서는 예기치 않은 상황이 자주 발생했다. 특히 노면 상태가 안 좋은 경우 조령 정상을 넘기가 힘들었다. <표참조>

'비를 맞으면서 조령(鳥嶺)에 오르는데 잿길이 진흙이어서 말발굽이 빠지므로 가기가 매우 힘들었다. 고개 위에 초사(草舍)를 설치하여 일행의 말(馬) 갈아타는 처소로 하였다.'-<신유한의 해유록>

'고갯길이 질어 거의 사람의 무릎이 빠지므로, 간신히 고개를 넘어 문경에 도착했다.'-<조엄의 해사일기>

한편 일본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상행로의 경우 부산의 人馬가 조령 인근까지 통신사 일행을 운송했다.

그러나 부산~조령은 도보로는 매우 먼 거리로, 말은 물론 수행자 중에도 과로자가 생겨났다.

경섬은 '해사록'에서 상행길(복로) 여정의 일부를 '마부와 말은 부산에서 여기까지 달려 와서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본도의 마부와 말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뱃길로 가려 하였으나 배도 또한 마련되지 못하였다'라고 적었다.

조선통신사 하·상행 여정

()는 정황상 조령을 넘은 것이 확실하나 원문에는 등장하지 않음.

상행로와 하행로가 겹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행길에 여흥을 제공받았던 안동, 경주는 다시 거치지 않고 대신 경상우도의 대구를 경유했다.

그러나 귀로(상행길은 주변에 계립령, 이화령 그리고 멀리는 추풍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행로와 마찬가지로 거의 대부분 조령을 경유했다.

이는 상행로에도 공로(公路) 개념이 적용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행로 기록은 하행로와 다르게 생략되거나 짧게 기재되는 경우가 많았다. 동사록, 동사일기 등이 여기에 속한다. <표 참조>

이는 △여행에 지쳤을 가능성 △임무를 완수한데서 오는 긴장 이완과 안도감 △하루빨리 가족을 보고픈 마음 등이 더해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홍우재는 동사록에서 그 이유를 "재촉해서 올라왔기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맑음. 인동에서 아침 먹고, 날이 저물어서 세 사신에게 하직하고 떠나서 오리원(梧里院)에 이르니, 의성의 원 남상훈(南尙薰)이 와서 접대했다. 베개와 칼 등 두어 종류를 보냈다. 이 이후는 길을 재촉해 왔으므로 수고로워 일일이 기록하지 못했다.'-<1683년 11월 8일자>

/ 조혁연 대기자

자료 도움: 충북대 사학과, 산림청,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으로 취재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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