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2015.02.03 17:36:31

김대종

청주시립예술단 사무국장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당시 그리스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랑하는 인물 중에 한사람으로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1923-1977)를 꼽았다. 당시 올림픽 개막식 때 아테네 주경기장에 울려 퍼지는 마리아 칼라스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장내가 잠시 숙연해지기도 하였다.

신이 내린 목소리 마리아 칼라스는 그의 예술적 명성과는 달리 사랑 때문에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운명적인 여인이었다. 5,60년대에 오페라계를 풍미하던 그녀였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그리 순탄치 못하였다. 칼라스에게는 모두 세 명의 남자가 있었다. 첫 번째 남자는 이탈리아의 부유한 사업가 메네기니였다. 그는 칼라스의 첫 남편이자 매니저로서 그녀를 세계 오페라 무대에 당당히 등장시킨 인물이었다. 두 번째 남자는 당시 大지휘자였던 툴리오 세란핀이었다. 그는 칼라스에게 오페라 가수로서의 자신감을 심어준 훌륭한 스승이었다. 세 번째 남자는 세계적인 거부 그리스의 선박왕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였다. 칼라스와 오나시스의 만남은 그녀의 비극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칼라스가 오나시스와 첫 만남을 가졌을 당시 메니기니와는 여전히 서로 사랑하는 부부였다. 그러던 어느날 오나시스의 초대로 두 사람은 오나시스의 요트 크리스티나를 타고 함께 여행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이 요트 여행이 끝날 즈음에 오나시스와 칼라스는 묘한 관계로 발전되었다. 이로 인해 그동안 화목했던 메니기니와의 결혼생활은 막을 내리게 된다.

오나시스는 칼라스를 철저하게 물질주의와 향락주의에 물들게 만든다. 무대의 오르기 보다는 오나시스가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하는 것을 우선으로 했고 자신의 연주 스케줄 보다는 오나시스의 스케줄에 더 몰두하며 지냈다. 칼라스는 그야말로 몇 년간을 상류사회의 향락에 빠져 지냈다. 몇몇 사람들이 그녀에게 간곡하게 충고하여 다시 무대에 오르기도 하였지만 온통 오나시스 한사람 생각으로만 채워져 있는 칼라스를 되돌리기는 쉽지 않았다. 오나시스를 평생의 반려자로 생각하고 핑크빛 꿈에 졌어 있던 그녀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바로 그토록 사랑했던 오나시스가 전 미국 대통령의 미망인 재클린 캐네디와 재혼을 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된 것이었다. 오나시스의 갑작스런 배신으로 그녀는 황폐해졌고 모든 기력을 탕진해 버렸다. 목소리는 더 이상 전성기와 같지 않았고 연주에 대한 열정은 이미 사리진지 오래였다. 자신의 세월이 다 가버렸음을 알아차린 칼라스는 뉴욕에서 조용히 후학 양성을 하며 지내게 된다. 1973년, 74년에는 절친한 친구인 테너 주세페 디 스테파노와 함께 순회공연을 떠나기도 하였지만 성과는 기대에 못미쳤다. 육체적으로 무리한 공연 일정을 마친 얼마 후 마리아 칼라스는 또다시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된다. 자신을 철저하게 배신했지만 마지막까지 그의 여자가 되기를 원했던 오나시스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것이다. 이 소식은 칼라스에게 견딜 수 없는 정신적 충격이었다. 결국 그녀는 모든 의욕을 상실한 채 지내다 오나시스가 세상을 떠난 3년 후인 1977년 9월 16일 파리의 한 아파트에서 심장마비로 조용히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 시대 최고 오페라 디바의 쓸쓸한 임종을 마지막까지 지켜 본 사람은 오로지 그녀의 간호사와 집사뿐이었다. 그 때 그녀 나이 54세였다. 오페라의 여신 마리아 칼라스... 그녀는 진정 세계인 가슴 속에 영원히 존재하는 하나의 신화로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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