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 나라의 국모다! 뮤지컬 '명성황후'를 말한다

2015.03.17 13:53:56

김대종

청주시립예술단 사무국장

요즘 공연시장의 대세는 단연코 뮤지컬이다. 이 대세의 90% 이상은 해외 작품이 지배하고 있다. 세계 4대 뮤지컬 '캣츠', '오페라의 유령', '레미제라블', '미스사이공'을 비롯하여 '지킬 앤 하이드', '맘마미아', '시카고', '삼총사', '노틀담 드 파리' 등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작품들은 저작권을 사서 한국 실정에 맞게 재창작된 라이선스 작품들 이다. 이러한 외산 뮤지컬 홍수 속에 어려운 역경을 이기고 세계 뮤지컬 시장에 우뚝 선 순 토종 뮤지컬 작품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뮤지컬 '명성황후'이다.

올해가 '명성황후'가 무대에 올려진지 꼭 20년이 되는 해이다. 국내 창작 뮤지컬 최초로 100만 관객, 1천회 공연 돌파의 신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제작자이자 연출가인 윤호진 이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윤호진 대표는 예전에 필자가 대학로에서 연극 작업을 할 때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첫 인상이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온화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윤호진은 영국 연수 중 뮤지컬의 엄청난 파워를 체험하게 된다. 이에 충격을 받은 윤호진은 세계적인 한국형 뮤지컬 제작을 꿈꾸게 된다. 소재를 찾던 중 비운의 국모 명성황후의 스토리에 상당한 매력을 느껴 이를 평소 알고 지내던 작가 이문열에게 희곡을 의뢰하였다.

제작 과정에서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윤호진 특유의 집념과 오기로 끝까지 밀고 나갔다. 부족한 제작비는 자신의 집을 저당 잡히면서까지 이 작품에 몰입하였다. 당초 음악은 '레미제라블', '미스사이공'의 작곡자 클로드 미쉘 쇤베르크에게 의뢰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제작비를 투자하기로 했던 예술의전당이 갑자기 계획을 취소하면서 쇤베르크와의 작업이 무산 되었다. 제작진은 위기감을 느껴지만 윤호진 대표는 오히려 이를 전화위복의 기회라 생각했다. 한국음악의 실정을 잘 아는 김희갑, 양인자 부부에게 작곡, 작사를 의뢰하였고, 무대디자인 박동우, 조명디자인 최형오, 의상디자이너 김현숙 등 당시 그 분야의 최고라 인정받는 전문가로 스텝을 구성하며 새롭게 모습을 갖춰 나갔다.

처음에는 명성황후 시해 100주기를 맞는 1995년 10월8일에 초연 할 예정이었으나 제작의 내부 사정으로 인해 그 해 12월 30일 오페라극장 무대에 첫 공연을 올리게 되었다.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초연의 성공에 힘입은 윤호진 대표는 해외 시장에 출사표를 던졌다. 먼저 뮤지컬의 메카라고 하는 런던 뮤지컬 시장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동양의 작은 나라의 이름 없는 제작사에게 쉽게 공연장 문을 열어 주는 곳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미국 쪽으로 방향을 틀어 뉴욕 링컨센터를 다섯 번의 도전 끝에 대관승인을 받아냈다. 물가 비싼 미국에서 턱없이 부족한 제작비를 충당하기 위해 극단 간부들의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고 배우와 스텝들이 인건비를 제작에 투자했으며, 뉴욕 현지 교민들도 조금씩 도움을 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1997년 8월15일 드디어 브로드웨이 무대에 공연을 올린 '명성황후'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명성황후'는 2002년 런던 웨스트엔드 아폴로해머스미스극장, 2003년 L.A 코닥극장, 2004년 토론토 허밍버드센터 등의 무대에 올려졌다.

600 여벌의 의상, 61곡의 노래, 12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순 토종 뮤지컬 '명성황후'는 우리가 끝까지 사랑해야 할 우리의 뮤지컬로서 한국 뮤지컬의 자긍심이요 힘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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