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死)의 찬미(讚美) 그리고 윤심덕

2015.06.23 13:25:58

김대종

청주시립예술단 사무국장

우리나라 최초의 국비유학생, 최초의 여류 성악가, 최다 음반 판매량 보유자…. 이 말들은 사(死)의 찬미(讚美)의 주인공 윤심덕에게 따라 붙었던 수식어다.

1897년 1월26일 평양에서 태어난 윤심덕은 당시 동양여자로는 보기 드물게 키도 크고 목이 길어 매력적인 서구적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매사에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그녀는 억압받던 여성들의 추앙의 대상이었으며, 뭇 남성들의 흠모의 대상이었다. 윤심덕은 최초의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 도쿄음악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그녀는 운명의 남자 김우진(金祐鎭)을 만나게 된다. 김우진은 목포의 부유한 집안의 장남으로서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그는 전공 보다는 희곡에 관심을 가지고 그 쪽에 매진하였다. 김우진은 당시 처자식을 둔 유부남 있었다. 김우진이 활동을 하던 극예술협회 공연에 윤심덕이 찬조 출연을 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녀가 출연하는 음악회는 항상 초만원이었다. 서구적인 외모에 감미롭게 부르는 그녀의 노래 소리를 들은 남자치고 마음 설레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윤심덕에게 이러한 화려함은 빛 좋은 개살구였다. 명성과는 달리 벌이가 넉넉치 못했다. 여기저기에서 공연을 하였지만 당시에는 출연료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 없던 시대라 푼돈으로 주는 사례금으로는 생활하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무능한 그의 아버지 덕에 집안에서는 은근히 그녀에게 기대고 있는 입장이었다. 집안 문제는 물론이요 자기 자신에 대한 무성한 소문들은 젊은 윤심덕이 견디기에는 너무 힘든 고통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삶에 대한 환멸과 비관은 점차 커져만 갔다. 이런 그녀에게 김우진은 커다란 안식처였다. 이 시기에 윤심덕은 동생의 미국 유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일본 오오사카로 건너가 레코드 취입을 결정한다. 당초에는 동생 성덕의 피아노 반주로 26곡만 녹음하기로 계약이 되어 있었는데 윤심덕이 한 곡 더 추가 하자고 제안을 하였다. 회사 입장에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세상에 나온 노래가 바로 '사의 찬미'다. 이 노래는 루마니아 작곡가 이바노비치의 '다뉴브강의 잔물결'에 가사를 붙인 것으로서 노랫말은 윤심덕 자작이라는 말도 있고 김우진이 지은 시라는 말도 있다.

"광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너 가는 곳 어데이냐/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눈물로 된 이 세상이/나 죽으면 그만일까/행복 찾는 인생들아/너 찾는 것 설음"

취입을 마친 윤심덕은 김우진에게 오오사카로 오라고 전보를 쳤다. 김우진과 윤심덕은 강춘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다음날 관부연락선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새벽 4시, 가지런히 벗어 논 두 켤레의 신발만 남겨 놓은 체 두 사람은 현해탄에 몸을 던졌다. 두 사람의 자살에 대해 당시 동아일보는 이렇게 실었다.

"지난 3일 오후 11시 시모노세키를 떠난 부산으로 향하던 관부연락선 덕수환이 4일 오전 4시경에 대마도 옆을 지날 즈음에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으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였는데 즉시 배를 멈추고 부근을 수색하였으나 그 종적을 찾지 못하였다.(중략) 연락선에서 조선 사람이 정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더라"

이때 그녀 나이 서른살. 윤심덕, 그녀는 그야말로 자신이 부른 노래 가사처럼 험악한 고해로 그들의 진정한 삶과 사랑을 찾으러 몸을 던진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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