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

신종석의 에세이 풍경

2015.08.16 13:42:37

신종석

삼복더위로 숨쉬기조차 힘든 나날이다. 내려쬐이는 볕은 따갑다 못해 후끈후끈하다. 그러나 더위를 피하기보다는 즐겨보자는 심산으로 산과 바다를 찾아 짐을 꾸리는 사람들이 부럽지는 않다. 이제는 더위를 피해 어디를 간다는 자체가 심드렁해진 나이가 되었다. 뜨겁게 사랑할 사람을 만나거나 목숨 걸고 지킬 약속을 하는 것도 인생의 가장 활발한 여름 이라는 시절도 아니다. 내게 여름은 지치고 견디기 어려운 계절일 뿐 아무런 의미가 없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강한 볕을 그대로 받으며 길을 건너다 사거리 교차로에 그늘막을 설치해 놓은 것을 보았다. 쨍쨍 내리쬐는 볕을 비켜서서 건널목 신호를 기다리며 생각이 많아진다. 그늘막의 출처를 보니 청주시 주민센터에서 설치한 것이다. 아주 작은 배려로 주민들 의 고충을 덜어주는 주민센터에 감사하다. 그러나 임시 그늘막으로 끝나지 말고 그곳에 느티나무를 심으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사거리 교차로엔 요즈음 소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다. 늘 푸르고 씩씩한 소나무를 보면서 한국 사람의 기개를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은 좋다. 사거리 교차로에 소나무 대신 느티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매미가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소리는 들을 수 있을까? 새들도 찾아올까? 평상이라고 하나 놓아둔다면 오는 사람 가는 사람 잠시 않아서 통성명이라도 할까? 잠시 현실에 맞지 않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따라 고향마을에 수호신처럼 지키고 서있던 커다란 느티나무 그늘이 그립다. 마을입구에 늙은 느티나무는 여름이 되면 늘 붐비는 곳 이였다. 아버지의 낮잠 자는 곳이기도 했고 할아버지 심심풀이 장기를 두는 곳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가끔 어르신들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이웃 아낙네들과 수다를 떠는 곳이기도 했다. 할머니가 손자를 낮잠 재우러 나오셔서 열심히 부채질을 하시기도 했으며 우리 집 황구가 혀를 빼물고 헐떡이며 숨을 고르는 곳이기도 했다. 느티나무 그늘은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에 그 진가를 발휘했다. 이웃 간에 소통의 장소이기도 했으며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다. 이별의 장소이기도 했으며 기다림의 장소이기도 했다. 느티나무 그늘 아래서 하염없이 서 있던 어머니의 모습은 지금도 가끔 꿈에 보인다. 돌이켜보니 나에게 그늘이 되어 주었던 분들은 부모님 이었다. 그 그늘아래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진액을 빨아먹고 컸다. 장수풍뎅이처럼 말이다. 지금은 마을을 지키던 늙은 느티나무는 사라져 버렸고 느티나무그늘 같았던 부모님도 생전에 계시지 않다.

아침 일찍 남편이 흔들어 깨운다. 보은군 원정리에 있는 느티나무 사진을 찍으러 가잔다. 눈을 비비고 따라간 그곳엔 어린 시절 우리와 함께한 늙은 느티나무와 닮은 나무가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 있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서 느티나무를 덥석 끌어안았다. 나무의 향기가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눈물이 왈칵 솟는다. 남편은 그 모습이 정겨워 보인다고 마구 셔터를 누른다. 아마도 나의 눈물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반가운 마음이 부모님 품속을 찾은 것 같이 아늑하고 포근하다.

나도 이제는 느티나무처럼 그렇게 늙어가고 있다. 우리 부모님이 그랬듯이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위안이 되는 사람 힘들고 지친 사람에게 그늘이 되어주는 사람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들과 딸 손자들이 모여 나의 그늘 아래 즐거운 시간이 되기를 바래본다. 상처 난 곳의 수액을 개미와 사슴벌레, 장수풍뎅이가 포식을 하듯 나의 상처마저도 내어주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한 그루 늙은 느티나무처럼 그렇게 늙어 가다가 부모님처럼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고 싶다. 늙은 느티나무 아래서 오랫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교차로 건널목의 임시 그늘막은 잊고 있었던 고향의 느티나무와 부모님을 그리워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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