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cene Number 사 (장면 사)

2016.11.21 20:48:57

김근진

충주경찰서 여청청소년과장/경정

어두운 밤.

깎아 놓은 듯 가파른 산꼭대기.

노인이 가만히 눈을 감으며 사내에게 말한다.

이제부터 나는 맑은 공기와 함께 쉴 것이다.

너는 아래를 보거라. 그리고 보이는 대로 말하라.

사내는 아래를 보려고 했지만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시커먼 구름과 도시의 매연, 소음으로 뒤범벅된 안개 때문이었다.

구름을 비켜, 안개를 헤집고 나서야 겨우 볼 수 있었다.

낯익은 시내가 보입니다.

창문을 통해 사람들이 보입니다.

온 가족이 거실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게 보입니다.

이웃집엔 팔베개를 한 노인이 홀로 잠들어 있고, 보는 이 없는 TV만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저기입니다. 제가 사는 곳입니다.

그만 됐다. 다른 곳을 보아라.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찬 거리가 보입니다.

팔짱을 낀 젊은 연인이 소곤거리며 걷고 있습니다.

부부인 듯 주황색 유모차를 미는 여자와 아이를 안은 남자가 지나갑니다.

또 현란한 네온사인이 어리석은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술에 취해 넘어질 듯 비틀거리는 사람.

그와 부딪쳐 욕을 해대며 바닥에 침을 뱉는 사람.

몸조차 가눌 수 없어 주저앉고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이를 바라보는 사람.

저기입니다. 어제 갔던 술집입니다.

그만 됐다. 다른 곳을 보아라.

이번엔 응급실이 보입니다.

한쪽 구석에서 커다란 고통과 슬픔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그 고통이 여인의 갈대 같은 몸을 휘감고 있습니다.

여인은 아무런 저항조차 할 수 없어 부러진 갈대처럼 침대에 겨우 기대어 있습니다.

여인의 가슴은 고통의 용광로 속에서 모두 타버렸습니다.

헝크러진 머리의 작은 소녀가 옆에서 울고 있습니다.

맥박보다 더 빠른 어깨의 흐느낌이 소녀를 부수고 있습니다.

소녀의 눈동자는 이미 슬픔의 바다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습니다.

이제 그들에겐 아무런 희망도, 더 이상 절망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괴로움이 제게도 밀려옵니다.

무척 힘듭니다. 더 이상 말할 수 없습니다.

계속 해라. 보이는 대로 말하라.

흰 옷을 걸친 안경 쓴 남자가 다가와선 뭐라 말합니다.

그들은 잠시 고개를 들고는 거친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쓰러지고 맙니다.

갑자기 사내는 경련과 함께 공허한 밤하늘 속으로 비명을 질러 댔다.

비명은 메아리가 되어 사내의 고막을 찢어 놓고 차가운 기억의 파편을 들춰냈다.

부딪히는 술잔들, 흔들리는 자동차 전조등, 뿌연 시야, 부서진 플라스틱 조각, 널브러진 쇳덩어리, 그리고 피투성이로 내동댕이쳐진 몸.

사내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울고 있으나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계속 해라. 보이는 대로 말하라.

흐윽. 아악. 으아학. 제 부인과 딸입니다.

제 가족입니다. 저들이 왜 저기 있죠.

이미 죽은 채로 그 침대에 누워 있는 저 자는 대체 누구입니까·

……

무슨 말이라도 해 보세요.

……

사랑하는 저 여인과 제 어린 딸을 어떻게 합니까·

여기는 과연 어디입니까·

아아. 아아악. 다시는 저들 곁으로 돌아갈 수 없단 말입니까·

……

아악. 아악. 아아하학

음주운전. 후회하기엔 너무 늦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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