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연가戀歌

2016.12.05 14:33:17

광활한 들판위로 펼쳐진 억새바다 속을 걸어보시라. 누구든지 하얀 솜털 같은 상념 한 자락쯤 올라오리니. 무리지어 흔들리는 억새풀들은 바람 따라 군무를 하고…. 그 흔들림에 몸과 마음을 얹고 걷노라니, 은빛자락 사이에 숨어있던 하얀 혼백과도 같은 아득한 내 젊은 날의 몸짓들이 보인다. 금빛보다 찬란한 은빛물결사이로 일렁이는 퇴색하지 않는 영롱한 추억들이 쌉쌀하고도 달콤한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쓰러질 듯 쓰러질 듯 그러나 다시 일어서는 억새들을 보노라니, 약한 듯 여린 듯 강인하셨던 내 어머니가 생각난다. 어머니가 일곱 살 때, 외할머니는 세끼 밥을 먹일 수 있다는 이유로 어린 딸을 데리고 재혼을 하셨단다. 이태마다 태어나는 이복동생들 속에서 외할머니는 어린 어머니를 조혼시켜야만 했단다. 그렇게 어머니는 열일곱 살에 얼굴 한번 안본 아버지와 결혼 하셔서 육남매를 낳고 평생을 사셨다.

어머니는 강인하면서도 여리셨다. 새벽부터 들일과 집안일을 하시곤 밤늦도록 바느질을 하시는 성벽같이 강인한 분이셨지만, 가끔은 돌아누워 어깨를 들썩이며 우시는 나약한 어머니를 장지문 사이로 보곤 했었다. 어머니가 슬퍼하는 이유를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그렇게 우시는 어머니가 싫어 나는 종일 우울했고, 사람을 향해 반감을 갖는 모난 아이가 되어갔다. 지금은 어머니일생을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난다. 이제는 그 눈물을 닦아 드릴만큼 내가 둥글둥글해졌거늘 어머니는 계시지 않는다.

바람에 흔들리지만 꺾이지는 않는 억새밭을 걸으면서 새 힘을 얻은 적도 있다. 숨 가쁘게 흘러가는 강물처럼 앞만 보고 정신없이 가다 건강을 잃고 나서야 돈이 삶의 전부가 아닌 것을 깨달았던 중년의 어느 날, 불현듯 해질녘의 고향강변이 견딜 수 없게 그리웠다. 떠나리라…. 떠나리라…. 그렇게 떠나고 싶어 소풍가듯 떠나왔던 고향강변을, 인생의 전환점에서 그리움에 허기진 사람처럼 그날 찾아갔었다.

대청댐이 들어오면서 강은 가늘어지고 피폐하게 변해 있었다. 강변에 줄지어 서있던 미루나무도 자갈도 모래도 사라져 버렸다. 푸르고 아름다운 예전 모습을 잃어버린 강을 보고 울었다. 그런데 조금 걷다 보니 황폐하게 늪지대가 형성된 자리에 억새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비워져 허허로운 자리를 은빛물결로 가득 채워 일렁일렁 거리고 있었다. 자생하는 능력이 끈질긴 억새는 다 빼앗겨도 다 사라져도 주어진 환경에서, 억새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을 펼쳐내었다.

사랑만큼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으랴. 갈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를 보노라면 눅진 나이임에도 정서가 촉촉해지면서 내 젊은 날의 추억이 떠오른다. 그날도 억새무리가 율동에 음률을 실어 서걱서걱 노래했었다. "나 미옥씨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 요즘젊은이들의 요란한 청혼이벤트를 보면서 청혼도 받지 않고 결혼했다고 중얼거릴라치면 이 한 문장이 청혼이었다고 남편은 우긴다. 그해 가을밤 고향언덕에 그와 앉아 있었다. 사랑인줄도 모르고 청혼인줄도 모르고 갯버들 같이 부드러운 그를 애써 거부할 때, 달빛에 반사된 억새무리가 하도 하얘 푸르스름했었다.

억새처럼 끝없이 일어서는 본능적인 욕망보다 아직은 가보지 않은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었던 그때의 어리숙함이 몹시 아름답다. 홍해가 갈라지듯, 천상으로 가는 길처럼 오붓하게 난 은빛숲길을 걸으며 생각한다. 비록 몸은 억새처럼 휘어져 갈지라도, 혼자보단 둘이 좋고 둘보단 여럿이 좋아 부대끼며 어울리는 삶을 연출하는 억새무리처럼 나이 들어가고 싶다. 버려진 습지대임에도 생명의 뿌리를 보듬어 안고 햇살과 바람의 숨결로 새로운 세상을 펼쳐내는 억새처럼 기품 있고 싶다.


이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

<저작권자 충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관련기사

PC버전으로 보기

충북일보 / 등록번호 : 충북 아00291 / 등록일 : 2023년 3월 20일 발행인 : (주)충북일보 연경환 / 편집인 : 함우석 / 발행일 : 2003년2월 21일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무심서로 715 전화 : 043-277-2114 팩스 : 043-277-0307
ⓒ충북일보(www.inews365.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by inews365.com, I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