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이 스쳐갈 때

2016.12.06 17:48:30

장정환

에세이스트

첫눈을 기다리지 않았다. 첫눈에 대한 설렘도 없이 오랜 겨울을 보냈다. 지난밤엔 첫눈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이제는 생경해진 그 단어를 또 오랫동안 웅얼거렸다.

까만 창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첫눈이 없는 겨울을, 첫눈이 내리는 날 낭만적인 약속도 없이 겨울을 잘도 참고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눈을 기다리지 않은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왜 더 이상 눈을 기다리지 않는 것일까.

아주 오래전, 사무실 창밖으로 눈이 쏟아지기 시작하고 함박눈이 겨울의 메마른 나무 가지위에 소복하게 쌓여갈 때 난 마음이 다급해졌다.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하는 가로등 불빛 속으로 현란한 낙화처럼 날리는 눈발을 온몸으로 맞으며 난 걸음을 재촉했다. 귀가 길에 시장에 들러 치킨 한 마리를 사거나, 길목 빵집에서 구수한 냄새가 나는 빵 한 보따리나 케이크를 사서 나는 땀이 나도록 걸었다.

토끼 같이 맑은 애들과 깔깔대며 음식을 나눠먹고, 그 눈 덮인 풍경 속으로 함께 잠길 때의 감격, 애들의 발그레해진 볼과 차가워진 작은 손을 비벼주며 농도 짙은 따스함을 느끼던 시간들.

하늘로부터 쏟아지던 눈송이들의 화려한 군무를 바라보며 난 이 시간이 영원할 줄 알았다. 하지만 눈이 지상에 머무는 시간은 무척이나 짧았고, 지상으로 내리던 눈들이 바람에 휩쓸려 다시 하늘로 올라가버리듯이, 그 시공간은 순식간에 무력하게도 사라졌다.

이제 난 늙었고 애들은 커서 독립했다. 그동안에 난 교차로의 신호를 준수하듯이 사회의 균형과 중용을 지켰고, 쾌적함과 편안함을 얻기 위해 질서와 예절을 따르는 소시민의 소박한 세계에 안착했다.

시민이 된다는 것, 평범하게 사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극단이 아닌 중간쯤에서 스스로 알아서 운신하고, 치명적인 뜨거움과 차가움은 피하면서 적당한 온기로만 만족하는 자세로 난 살았다. 하지만 시민의 자아를 지키며 소박한 일상인의 삶을 지탱하는 것조차 사실 버겁고 외로운 일이다.

적당한 밀도의 시민으로 살아내는 동안 난 첫눈을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았다. 그 첫눈의 낭만적인 약속과 설렘도 잃어버렸다. 그건 가슴 떨리던 첫 키스의 기억을 잊어버린 것만큼이나 망연한 일이었다.

남들과 똑같은 시민적 삶을 살기 위해 번잡하고 소란한 네온간판의 불빛을 이정표 삼으며, 눈도 내리지 않는 겨울 거리를 난 얼마나 진부하고 무심하게 걷고 또 걸었던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눈을 기다리고, 눈을 맞으며, 눈을 바라본 것이 몇 번이나 되는지 되새겨보았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내 아들과 딸들아(며느리도 딸이다). 하루하루 성실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게 벅차더라도 너희들은 첫눈을 그냥 스쳐 보내지는 말거라.

첫눈의 신화는 단지 계절의 순환만이 아니다. 그것을 설레며 맞이할 때 단순하게 흐르는 시간이 새로운 공간으로 재변신할 것이며, 무의미한 시간이 해탈할 것이고, 그때 비로소 시간의 순수를 만나게 될 것이다. 이건 '영원'을 정의한 헤르만 헤세의 말이기도 하다. '영원'은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기습처럼 쏟아지는 함박눈을 나도 이제 기다리려 한다. 하여 내 남은 생애의 눈꽃들이 그리움으로 쌓이면 기쁘겠고, 마지막 눈이 내릴 때까지 우린 약속하고 또 만나고, 눈이 내릴 때마다 목젖이 보이도록 껄껄거리며 웃으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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