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다. 전남 순천 조계산에서 열린 84차 충북일보 클린마운틴 참가자들이 출발 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나무의 균형이 적당하다. 돌 하나에도 고귀함이 깃든다. 겸손과 절제의 지혜 같다. 영혼을 깨우는 철학이다. 평화로우니 더 아름답다. 긍지를 높이는 공간이다. 좀처럼 떠나고 싶지 않다.
ⓒ함우석주필발길 닿는 곳마다 초록이다. 길이 녹색으로 자리를 편다. 순하디 순한 초록 터널이다. 유순한 강물처럼 이어진다. 장군봉의 호위가 장엄하다. 순하지만 강력하게 흐른다. 바람의 노래에 장단 맞춘다. 바람을 타고 계절이 흐른다.
'천년불심길'은 굴목이재를 넘는 길이다. 조계산 자락의 어깨를 타고 넘는다. 선암사에서 송광사까지다. 어디서든지 시작할 수 있다.
선암사는 곱게 늙은 절집이다. 태고종의 본산이다. 조계종 승보사찰인 송광사와 쌍미를 이룬다. 그야말로 '동선암 서송광'이다. 입구부터 아늑하고 정갈하다. 선암사 풍경을 눈으로 먼저 만난다.
승선교를 바라본다. 세속에서 극락으로 가는 상징이다. 무지개 너머 있을 풍경을 상상한다. 강선루에 잠깐 머문다. 신선이 내려오는 다락집이다. 승선교와 강선루가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선계와 속세를 들고 난다.
늦은 아침 차분한 걸음으로 향한다. 숲의 부름을 억누르기 어렵다. 둥그런 원형 섬의 전통 연못 하나가 보인다. 못 주변이 난형으로 부드럽다. 하늘로 향한 전나무 세 그루의 풍모가 늠름하다. 절집 입구부터 초록 향기로 가득하다.
선암사를 유명하게 만든 건 매화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토종 매화다. 이제 선암매로 이름이 높다. 봄이면 어김없이 꽃을 피운다. 아늑한 절집과 잘 어울린다. 각황전 돌담길엔 늙은 매화나무 수십 그루가 줄을 선다.
선암매 만큼이나 유명한 게 또 하나 있다. 바로 선암사 '뒷깐'이다. 국내 사찰 재래식 해우소 중에서 가장 오래된 곳이다. 시인 정호승의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에 나오는 그곳이다. 최근 어떤 케이블TV서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나무 창 밖으로 펼쳐진 풍경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선암사 뒷간에 한참 동안 눈길을 준다. 그 곳에서 보이는 세상을 슬쩍 관조한다. 찰나 배설의 순환을 떠올린다. 마음 찌꺼기를 깊게 떨어트린다. 시인의 뒷간 예찬에 시원함을 덧댄다.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든다. 선암사에 들면 속세를 벗어나는 것 같다. 만세루 현판에 육조고사(六朝古寺)의 의미가 크고 깊다. 서포 김만중의 아버지 김익겸의 글씨다. 여기서 육조(六朝)는 육조(六祖) 혜능이다.
선암사에 대한 이야기는 끝도 없다. 여기에 다 적을 수도 없다. 그만큼 풀어낼 이야기도 엄청나다. 선암사는 포근하고 친근하다. 일찌감치 사적으로 지정됐다. 굴목이재가 지나가는 조계산 일원의 명찰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선암사는 선종의 아침을 여는 도량이다. 언제나 여여(如如)하다. '이랬다저랬다', '좋았다 싫었다'는 그저 내 마음일 뿐이다. 원통전 아래 와송을 보고 불교의 의미를 다시금 새겨본다.
절집 마당에 울리는 목탁소리가 구원처럼 들린다.
*코스=선암사 주차장-선암사-편백나무숲-선암굴목재-보리밥집-배도사 대피소-송광굴목재-송광사-송광사 주차장
/함우석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