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연산 청하골 십이폭포가 굽이굽이 이어진다. 관음폭포가 연산폭포를 타고 내려와 무풍폭포를 넘어 흐른다. 잠룡 삼보 폭이 하얗게 부서져 보경사까지 간다. 청류가 기암을 타고 첩첩산중에 천하절경을 만든다.
ⓒ함우석주필내연산이 품은 물줄기는 20리(약 8km)가 넘는다. 바로 청하골이다. 12개의 폭포가 기암절벽과 어우러져 절경을 뽐낸다. 시원한 물이 쏟아져 내린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다. 12폭골, 내연골, 보경사계곡으로 불린다.
물줄기는 산줄기를 따라 흐른다. 물줄기는 산의 높이에 따라 모양을 달리한다. 높이 차에 따라 크고 작은 폭이 생겨 기묘하다. 12개 폭포가 얻은 이름만 봐도 금방 알기 쉽다. 풍광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겸재(謙齋) 정선(鄭敾)이 청하골에 빠진 이유는 분명하다. 겸재의 화풍은 당시 유행하던 중국 화풍과 확연히 다르다. 새로운 눈으로 새로운 그림을 그렸다. 조선의 산수를 조선의 화풍으로 그렸다. 청하골에서 그 방법을 찾았다.
겸재가 살았던 시대를 돌아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겸재는 영조 9년인 1733년부터 1735년까지 청하현감을 지냈다. 2년 남짓의 이 시기에 조선 화단에 큰 획을 긋는 그림을 쏟아냈다. 진경산수(眞景山水) 화풍(畫風)을 완성시켰다.
겸재는 문경 이남의 명승 쉰여덟 곳을 그림으로 옮겼다. '교남 명승첩'이 바로 이시기 작품이다. '내연산 삼용추'와 '청하 내연산폭포'도 교남 명승첩에 실려 있는 그림이다. 내연산으로 여정을 위해 내가 본 두 장의 그림이다.
당시 조선 국토는 임진왜란에 이은 병자호란으로 유린당했다. 전란 후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무엇보다 자존감이 무너졌다. 혼란 상황 수습과 자존심 회복이 절실했다. 침략당한 치욕과 좌절을 어떻게든 극복해야 했다.
겸재는 극복의 방법으로 청나라의 야만성 부각을 선택했다. 대신 우리의 문화적 우월감을 고취하려 했다. 조선이야말로 문화국가의 중심임을 알리려 했다. 예의를 숭상하고 인륜을 지키는 선비정신을 기치로 내세웠다.
제일 먼저 중국의 화풍에서 벗어나려 했다. 우리의 자연을 우리의 눈으로 보려 했다. 그런 다음 우리의 붓끝으로 그려내려 했다. '우리 자신'의 그림을 그려려 했다. 겸재의 진경산수는 그렇게 탄생했다.
겸재의 진경산수는 그의 붓으로 이뤘다. 동시에 당시 조선 사회가 거둔 성취였다. 생각을 정리하니 겸재의 그림이 다시 보인다. 선일대에서 내려다보는 경관도 다시 보인다. 청하골 전체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다.
보는 눈이 달라지니 그림도 달리 보인다. 그림에서 비로소 진경산수를 보게 된다. 그림의 기교를 떠나 산수를 보게 된다. 세상을 보는 눈이 새롭게 바뀐 셈이다. 진경산수에 깃든 그 시대의 생각과 정신을 보게 된다.
등 뒤로 송골송골 땀이 맺힌다. 막바지 늦여름을 보내며 겸재의 '진경산수'를 다시 떠올린다. 사물을 보는 시각과 자연을 대하는 자세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