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나무를 닮은 여자

2017.08.20 15:16:07

신종석

숲 해설가

울타리를 부여잡고 올라앉아 여름을 홀로 빛나고 있던 능소화의 화려한 모습은 농염하고 도발적인 화려함을 뒤로하고 퇴색되어가고 있다. 이제 여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늘 한결같이 웃고 있던 배롱나무의 화려한 꽃도 탐스럽던 시기는 지나고 있다. 배롱나무를 닮은 여자에게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언제나 화사하고 웃음이 떠나지 않은 여자 그를 만난 것은 배롱나무 이름을 처음으로 알았던 해이기도 하다. 사찰이나 고택 그리고 서원에 가면 꼭 있었던 나무 그 나무를 보면서 참으로 멋지게 생겼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 나무의 이름은 알 길이 없었다.

목백일홍 또는 배롱나무는 내가 자주 보며 궁금해 했던 나무라는 것을 숲 공부를 하면서이다. 배롱나무는 무욕과 청렴의 상징으로 고찰이나 고택 정자나 향교 사원에 주로 심었다고 한다. 부산에 갈일이 있어 한번 본 적이 있는 부산 동래정씨 시묘 앞에 있는 800년 된 배롱나무는 저절로 고개가 숙여질 정도로 오랜 세월의 아픈 흔적이 나뭇가지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 모습이 애잔하고 아름다웠다. 안동의 병산서원 담양소쇄원 강진 백련사 고창 선운사의 배롱나무도 아름답고 어여쁘다. 어느 해 겨울 강진 백련사의 배롱나무 앞에서 선한마음으로 나무와 오랫동안 눈 맞춤을 했었다. 오로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살로 겨울을 견디는 선이고운 곡선의 가지와 우아한 품위에 나는 그 나무를 안고 위로 받은 적이 있다. 배롱나무를 사찰에 심는 이유는 껍질을 스스로 벗어버리듯 속세의 정과 마음에 욕망을 다 벗어버리고 마음공부에 정진 하라는 뜻이라고 한다. 배롱나무는 수피가 얇아 나무줄기를 건드리면 잎이 흔들린다고 간지럼나무라고 하기도 하고 부끄럼나무라고도 한다. 봄이 한 참 무르익을 때 쯤 늦게 싹이 튼다고 하여 양반나무라고도 하고 꽃이 피고 지기를 백일동안 계속하여 백일홍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동쪽으로 벋은 가지를 다려 마시면 방광염에 좋다고 하며 가구나 조각품으로 만들면 결이 곱고 아름다워 가치가 높단다. 나무뿌리는 백일해에 좋으며 꽃으로 차를 만들어 마시기도 한다는 배롱나무 매력에 푹 빠져 여름을 배롱나무와 함께 보냈다.

내가 배롱나무를 닮은 여자를 만난 것도 숲 공부를 하면서이다. 나는 요즈음 사람과 꽃 그리고 나무를 연결시키는 버릇이 생겼다. 그녀의 목소리는 늘 발고 활기차다. 7∼8월에 피어나는 배롱나무 꽃처럼 화사하다. 화를 내거나 얼굴을 찌푸리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천박하거나 가벼워 보이지 않는다. 새싹을 늦게 틔우는 배롱나무처럼 그녀는 모든 일에 한 박자 느리다. 여유가 있어 보인다는 사람과 빠릿빠릿하지 못한 행동에 답답해하는 사람도 있다. 그녀의 웃음은 항상 밝다. 석 달 열흘 동안 피고 지는 꽃들이 날마다 화려하게 오늘 피워낸 꽃처럼 아름답지만 남모르게 꽃잎을 떨군다는 배롱나무처럼 그녀 또한 어렵고 힘든 내색은 조금도 하지 않는다. 내가 알기로는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이기고 있다고 들었는데 통 내색이 없다. 배롱나무가 남들 모르게 꽃잎을 떨구듯 그녀도 홀로 아파하고 있을 것이다. 조금만 자극을 줘도 온 가지를 흔들어 간지럼 나무라는 별명을 얻은 나무처럼 그녀 또한 조그마한 일에도 간드러지게 자극을 한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쉽게 동감하며 웃고 울기도 잘한다. 또한 껍질을 모두 벗어버린 배롱나무의 가지처럼 그녀도 자신을 감추거나 속이지를 못한다. 아무리 봐도 배롱나무를 닮았다. 그것도 꽃피어 있을 때의 화사한 모습 딱 그만큼이다.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의 배롱나무는 화사함을 잃었다. 뜨거웠던 하늘아래 그늘이 드리워지고 있다. 그가 가장 아름다웠던 석 달 열흘의 시간도 시들고 있다. 그녀는 화사하게 웃으며 나를 반겼지만 화사함 웃음 뒤에 서글픔을 보고 말았다. 그녀가 떨군 시들지 않은 빨간 슬픈 꽃잎을 조심스레 찾아보았다. 화사했던 여름은 뜨거운 태양아래 그늘사이로 뒷모습을 보이고 있다. 불어오는 서늘해진 바람과 함께 가을을 코앞에 두고 우리는 함께 쓸쓸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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