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재길이 가장 아름다운 가을을 준비 중이다. 점차 초록에서 빨강 노랑의 단풍으로 물들어간다. 짙은 나무그림자가 속계와 선계를 가르는 듯하다. 오대천 물소리는 세속의 줄을 끊는 아름다운 소리다. 선재길이 오대산 최고의 매력 포인트로 거듭나고 있다.
ⓒ함우석주필선재길은 국립공원관리공단이 2013년 10월 옛길을 복원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선재는 화엄경에 등장하는 지혜로운 구도자 '선재동자(善財童子)'에서 따왔다. 천년 역사가 살아나오는 이야기의 길이다.
오대산 월정사와 상원사를 이으며 갖가지 일화를 풀어낸다. 선승들만 걷는 구도자의 길만은 아니었다. 화전민과 같은 중생도 함께 걷던 길이었다. 고난과 아픔의 길이었다. 불교와 인연이 없어도 충분히 숙연하고 아름답다.
오대산은 해발 1563m의 높은 산이다. 오대산이 품은 계곡과 길도 많다. 그중 선재길은 오대천과 함께 하는 길이다. 전국의 내로라는 숲길 중 가장 아름다운 길이다. 요즘엔 가을 척후병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월정사는 한국전쟁 당시 팔각구층석탑(국보 제48호)을 제외하고 깡그리 불탔다. 1964년 탄허스님(1913~83)이 재건했다. '월정사=탄허스님' 등식 성립이 가능한 까닭은 여기 있다. 그런 탄허스님이 걷던 길이 선재길이다.
상원사는 월정사의 말사다. 하지만 명성은 결코 뒤지지 않는다. 한국전쟁 당시 월정사를 불태운 국군이 상원사로 올라왔다. 한암선사는 불상 앞에 정좌하고 소리쳤다. 스님의 일갈에 압도당한 장교는 문짝만 뜯어 마당에서 태웠다.
상원사 적멸보궁엔 부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 신라 성덕왕 때 만든 동종(국보 제29호)도 상원사에 있다. 한때 한강 시원지(始源地)로 불렸던 우통수도 절에서 멀지 않다. 물의 근원이었고, 구도자에게는 지혜의 샘이었다.
현대에선 탄허스님을 빼놓을 수 없다. 탄허스님은 한국 현대불교의 거목이다. 유불도(儒佛道)에 통달한 학승(學僧)이었다. 탄허스님은 10대 후반에 이미 상당한 학문의 경지에 달했다. 상원사 한암 스님(1876~1951)과 3년간 서신 문답 끝에 상원사로 출가한다.
약관의 청년과 57세 노선사가 나눈 교분은 '도'를 주제로 한다. 출가 후 탄허스님은 평생 경전 번역에 매진했다. 그리고 시대의 선각자로 추앙받았다. 지금도 전국 사찰에는 그의 제자가 강백(講伯·경론을 강의하는 승려)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선재길을 개통하기 전에도 길은 있었다. 월정사가 2004년부터 걷기 행사를 하면서 옛길 복원사업이 시작됐다. 아득한 천 년 전에 스님들이 두 발로 다졌던 흔적을 되찾는 작업이다.
선재길은 스님들이 가꿔온 숲이다. 대를 이어 정성껏 돌봤다. 나무의 간격도 조절하고 간벌도 하면서 길을 냈다. 부족하면 식목도 했다. 그렇 스님들의 손끝으로 가꿔졌다. 그래서인지 스님들과 잘 어울린다.
선재길은 순수하다. 천년의 지혜를 알린다. 여전히 '길(道) 찾는 길'이다. 구도의 의미는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오대천을 흐르는 물소리가 화엄경 암송소리로 변한다.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라고 가르침이다.
상원사를 내려오면 가을을 준비하는 자연과 만난다. 숲이 만드는 정취가 향긋하다. 단풍나무 하나가 빨간 잎을 만든다. 이미 반야에 든 한암스님과 탄허스님의 일갈이 허공을 삼킨다. 오대천 물소리가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