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가을에 있었던 일

2017.11.16 14:10:31

임미옥

청주시 1인1책 프로그램 강사

가을이 깊어간다. 해마다 가을이 오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 기억 저편에서 떠오른다. 1990년대 초쯤, 나는 어느 고객의 집에서 엉망으로 조율을 하고는 도망치듯 나와 버린 황당한 기억이 있다. 조율의뢰를 받고 나섰던 그날아침, 아파트 화단엔 된서리가 하얗게 내렸고 찬란하던 단풍들은 낙엽이 되어 굴러다니고 있었다.

의뢰인의 집은 우암산 기슭 다랑이 논처럼 층층한 곳에 있었다. 산자락을 타고 내려온 아침안개가 지붕을 뽀얗게 드리우고 있어 지척을 분간키 어렵고 이른 아침 이었음에도 정적마저 돌았다. 비스듬한 사립문을 지그시 밀고 들어가니 중년의 남성이 맞이한다. 낯선 남성 혼자 있는 것이 마뜩찮다 생각했지만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어둠침침한 방의 형광등 불빛 아래 피아노 한대가 덩그마니 놓여있다. 반짝거리는 피아노 경첩들이 한미해 보이는 집안 분위기와 동 떨어진다는 생각을 했었다.

조율을 하려면 먼저 피아노의 상판과 하판을 분리해야한다. 강한 조율 핀에 현들이 공작새가 날개를 펼친 것 같이 교차를 이루며 사선으로 걸려있다. 학이 내려앉은 것처럼 생긴 고운 상아색 해머들이 정렬해 있다. 가지런히 줄지어 있는 해머 뒤로 향판나이테가 잔물결을 이룬다. 피아노의 생명은 향판이다. 해머가 현을 칠 때는 미미한 소리가 나지만 향판에서 공명을 일으켜 방대한 울림과 웅장한 소리를 낸다.

정음을 찾아가며 조율을 하노라면 세상은 온통 멜로디다. 아름다운 멜로디로 넘치는 세상을 상상하며 제각각 파장을 일으키며 아우성치는 음들을 맞추어 간다. 수많은 고객의 집을 방문하여 조율한 뒤, 튜닝을 해보면 조율전과 현저한 차이가 나면서 소리들이 천상을 난다. 그때쯤 명곡 한곡 연주하며 손가락으로 건반을 쓰다듬는 쾌감을 어디다 견주랴. 적어도 그 전날까진 짜릿한 그 기쁨을 누리며 다녔다.

그런데 그날은 음산한 불안감이 돌았다. "딸아이가 피아노 치는 걸 좋아하네요. 제 어미가 없어 마음을 달래주려고 샀지요." 조율을 하려고 상판을 들어내는데 그가 등 뒤에서 말했다. 갑자기 아내가 없다는 말이 크게 되뇌어지며 좁은 방에 그와 둘이 있는 것이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생각이 나쁜 쪽으로 엇나가자 상상은 날개를 달기 시작했다. 등에 식은땀이 나고 다리가 후들거리며 피치가 들리지 않았다.

속히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건성건성 일을 하는데, 그가 방을 나갔다. 얼른 일을 마치려고 부지런히 속도를 냈다. 그런데 그가 하얀 면장갑을 끼고 다시 들어오는 거다. 손엔 뭔가 묵직하게 담긴 검은 비닐봉지까지 들고 온 것이 아닌가. '장갑은 왜 끼었지· 지문을 남기지 않으려고· 묵직한 저 봉지 속에 혹시 연장이· 오! 하나님!' 아이들과 남편얼굴이 스쳐 지난다. 도저히 더 이상은 일을 진행할 수 없었다. 나는 건반을 닫아버리고는 조율을 다했다고 했다. 그랬더니 "힘들어 보이시네요. 이것 좀 드세요." 그가 면장갑을 벗은 손으로 음료수 캔들을 꺼내는 게 아닌가.

세상에! 세밀하게 정음의 세계와 교감을 나누며 완전 조율만 추구하던 자부심은 어디로 가고 두려워 떨고 떨었던 자신이 한심했다. 현들의 맥놀이는 건성건성 듣고 큰 폭으로 쿵쾅쿵쾅 뛰는 심장의 맥놀이만 듣다 피아노 뚜껑을 닫고는 허둥지둥 그 집을 빠져나오는 모습이라니…. 하루가 멀다 하고 부녀자 납치 사건이 터지는 험한 뉴스를 접하곤 했으니 겁이 날만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만 변명하기엔 궁색했다.

손님을 거저 보내지 않고 음료수를 대접하는 선한 사람인 것을, 나는 그날 극심한 두려움의 늪에 있었다. 천국과 지옥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는 말처럼, 마음의 키워드가 어디를 택하느냐에 따라 천국에 있기도 하고 지옥에 있기도 한다는 것을 그날 경험했다. 잘 조율된 피아노 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격정 없이 고요하게 한다. 세상이 음악처럼 화음을 이룬다면 서로 간에 소통이고 어울림일 것을, 믿음이 깨진 그날 나는 지옥에 있었다. 산다는 건, 믿고 신뢰하며 피치를 상대방에게 맞추는 것, 즉 느슨해진 현은 조여주고 지나치게 팽팽하면 풀어주면서 함께 가는 것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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