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잔디의 꿈

2018.05.17 13:38:00

임미옥

청주시 1인1책 프로그램 강사

영운천변 산책로를 걷다보면 한 구간에서 꽃잔디 세상을 만나게 된다. 아름답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마는, 이 꽃은 함께 모여 피어서 더욱 아름답다. 손에 손을 잡고 마치 코러스 음악을 연주하듯 어우러져 천변가득 진분홍 물결을 이룬다. 새벽이슬에 세안하고 햇살에 반짝이는 꽃무리들이 오늘따라 하도 현란하여 걸음을 멈추자니 지난여름 청주 시내가 물에 잠겼던 일이 떠오른다. 그날 아침, 쏟아지는 장대비가 심상찮았지만 주일인지라 여느 때처럼 집을 나섰다. 영운천변에 있는 교회의 지하주차장에 차를 대고 창밖을 내다보니 영운천에 물의 광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궁창이 뚫려버렸나 보다. 빗소리에서 리듬을 듣는다는 건 정도껏 내릴 때 쓰는 시(詩)적 표현이다. 주룩주룩 쏴쏴도 적당히 내릴 때 들리는 소리다. 그날의 빗소리는 어찌 크던지 고막이 먹먹하고 고요하다 못해 적막했다. 낭만은커녕 노아의 방주로까지 생각이 번지며 두려울 정도였다. 새 한 마리 감히 날아오르지 못하고 천둥번개조차 묶어놓곤, 좍 하고 외마디 소리만 내며 직수로 쏟았다. 바닷물을 거꾸로 쏟아 붓는다는 표현도 과하지 않다. 그렇게 한 시간 내내 폭포처럼 퍼부었다.

누런 물살이 성난 파도처럼 소용돌이치며 상류에서 밀려온다. 거대한 황톳빛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회오리바람처럼 내달려와 교가(橋架)를 철썩철썩 때리며 높은 파도를 만들었다. 마치 구만리를 덮을 만한 날개를 가진 붕새가 나부대는 광란의 춤 놀음 같았다. 그러더니 누런 혓바닥을 널름거리며 하천을 넘어 아스팔트를 점령하여 강을 만들어버렸다. 그러고도 성에 안찼는지 광란은 계속됐다. 이번엔 방향을 트는가 싶더니 세상에! 하천보다 지대가 낮은 교회마당으로 쳐들어오는 거다. "지하에 있는 차들 빼셔요!" 누군가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다다다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로 가는 비스듬한 차량진입로는 최적(最適)의 수로로 바뀌어버렸다. 주차장은 이미 강이 되어 있었다.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악취가 진동하는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종아리까지 차오르는 물속에서 첨벙거리며 차를 빼는데, 영운천 둔덕의 꽃잔디들이 생각났다. 어쩌면 좋단 말인가. 다 떠내려가 버렸을 꽃잔디들이 안쓰러웠다. 심으시고 긴 가뭄에 물주며 가꾸신 목사님 땀이 헛수고가 되는 것도 쓰렸다.

격정의 시간이 지난 뒤 천변에 나가보았다. 수마(水魔)가 할퀴고 간 자리엔 풀 한포기 남지 않았다. 나는 초토화 돼버린 천변에서 꽃 잔디의 꿈을 슬퍼했다. 쓸려온 모래더미 속에 몇 포기정도 남은 것으론 희망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생명은 번식력이고 번식은 곧 생산이다. 모두 떠내려갔어도, 간신히 남은 그 몇 포기가 번식하여 오늘 둔덕 가득히 다보록하게 꽃을 피워냈으니 어찌 대견하지 않겠는가.

그날 범람했던 물의 광란은 가장자리에 있던 바위덩이를 한가운데로 옮겨놓아서 영운천의 지형을 바꾸어 놓았다. 레바논의 백향목이 생각난다. 레바논 백향목은 일 년에 1㎝씩만 자라는데, 위로 1㎝ 자라면 땅속으로도 1㎝씩 동시에 뿌리를 내린단다. 그렇게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므로 절대로 뽑히는 법이 없고, 아기 키만 한 나무일지라도 수백 년은 족히 되어서 자동차가 날아갈 태풍에도 건재하단다.

그런데 그처럼 시간을 두고 견고히 뿌리내리지도 않고, 다년초식물일 뿐인 꽃잔디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밀생하여 지표면을 덮으며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꽃잔디의 자생력은 무엇에 있는 겔까. 손에 손을 잡고 합력한 결과일까? 낮게 포복하고 있는 지혜에 물살이 너그러이 비켜간 걸까? 골몰하여 보나 신묘한 자연의 조화를 나로선 알 수 없다. 그저 인내심 없고 흔들림이 많은 자신을 돌아보며 서있을 뿐이다. '사람아, 너 약한 사람아.' 어디선가 부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 눈을 드니 파란 예배당건물과 조화를 이룬 작은 꽃송이들이 봄바람에 살랑대며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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