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여유

2018.11.18 15:46:35

김병규

전 상당고 교장·교육학박사

 모임이 있어서 급히 길을 나섰다. 약속시간은 빠듯한데 그날따라 길이 막혀 다른 차가 죽 늘어서 앞을 가로거치고 하필 신호까지 있는 대로 다 걸려 속을 썩인다. 신호만 걸리면 그나마 괜찮겠다. 남의 타는 속도 모르고 왜 이리 끼어드는 사람은 많은 건지 조그마한 틈에도 미꾸라지처럼 끼어들어오니 화가 끓어오른다. 그렇다고 점잖은 체면에 욕도 못 하고 속만 부글부글 끓이는데 아는 신부님의 얘기가 떠오른다. 이 신부님이 운전을 하는데 다른 사람이 깜빡이도 안 넣고 밀고 들어와 놀란 때문에 욕이 저절로 나올 지경이라. 성직자 체면에 함부로 욕도 못하겠기에 곰곰이 궁리한 끝에 차 유리창 앞에 신부님이 아는 욕들을 강도별로 10가지 정도 적어 뒀단다. 그러다가 욕 나올 운전자를 만나면 '얘, 너는 몇 번이다. 인마'라고 해 부화를 풀었다는데 그것도 수양이 된 사람이나 그렇게 할 수 있지 나 같은 범부에게는 요원한 일이고.

 다른 날 이런 경험을 거울삼아 시간이 충분하게 길을 나섰다. 가속 페달을 밟지도 않고 천천히 경제속도로 가렸더니 이상하게도 길이 뻥 뚫려 운전하기가 무지 편하다. 평소라면 몇 번은 걸릴 신호도 마치 누가 중앙제어시스템에서 특별히 나를 위해 봐주는 것처럼 한 번도 안 걸리고 무사통과다. 평소처럼 끼어드는 얌체도 없어 기분도 상하지 않은 상태로 참으로 여유 만만한 가운데 약속 시간도 넉넉히 지킬 수 있었다.

 참 이상하다. 똑같은 길을 비슷한 시간대에 나서도 이러 현상이 비일비재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주위의 친구들도 비슷한 경험을 했단다. 이유는 무얼까. 바로 마음이 문제이다.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는 조바심치느라 주변에 관대하지 못한 게고 여유가 있을 때는 끼어드는 사람에게 느긋하게 길을 내어줄 수도 있고 끼어드는 사람도 얌체가 아니라 얼마나 바쁜 사람일까 이해하는 입장으로 대하니 내 마음도 불편하지 않고, 어쩌다 신호등에 걸려도 정지선을 잘 지킴은 물론 급가속 출발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나의 마음에서 조급함과 여유가 비롯된다.

 마음에 대해 살피고 있을 때 마침 퇴계 선생의 글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항상 오래된 병에 괴로워하며 비록 산에 거처한다 해도 책을 읽는데만 전적으로 뜻을 둘 수 없었다. 깊은 근심을 조식하고 나면 이따금 신체가 가뿐해지고 편안해진다. 심신이 깨끗하게 깨어 우주를 굽어보고 우러러보면 감개가 그에 이어진다. 그러면 책을 물리치고 지팡이를 짚고 나가 헌함(軒檻)에 서서 연못을 완상한다. 더러 화단에 올라 마음 맞는 꽃을 찾기도 하고 채마밭을 돌며 약초를 옮겨 심고 숲을 뒤져 꽃을 따기도 한다. 어떤 때는 바위에 앉아 샘물을 튀기며 장난을 치기도 하고 대에 올라 구름을 바라보기도 한다. (중략) 마음 내키는 대로 가서 자유롭게 노닐다보면 눈 닿는 곳마다 흥이 인다. 경치를 만나면 흥취가 이루어지는데 흥이 극에 달해 돌아온다. 그러면 온 집이 고요하고 도서는 벽에 가득하다. 책상을 마주하고 잠자코 앉아 조심스레 마음을 가다듬고 연구 사색하여 왕왕 마음에 깨달음이 있기만 하면 다시 기뻐서 밥을 먹는 것도 잊었다.(후략)' -퇴계선생 문집 중

 이 정도면 가히 마음공부의 극강이라 하겠다. 공부가 깊으면 무구(無垢)해진다는데 내공이 얼마나 쌓였으면 자연과 노닐면서 은일유인(隱逸幽人)으로 고반(考槃)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

 마음이 여유로우면 실수도 안하고 다른 사람에게까지 너그러워 배려도 할 수 있는데 여유가 없으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만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해를 입힌다. 요즘 난무하는 SNS글이 눈을 번거롭게 해도 정작 마음공부에 도움이 될까 싶었는데 선생의 정치한 공부 결과를 보면서 우둔한 나 임에도 전한의 동중서처럼 下帷三年으로 장막 내리고 '심경'을 공부하면 혹여 근사하려나 하는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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