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白雪 낭만

산소편지

2018.12.13 16:45:35

임미옥

청주시 1인1책 프로그램 강사

 첫 눈이 온다. 창가에 서서 분분설을 바라본다. 부드러운 깃털 같은 것들이 나폴 나폴 날린다. 하얀 영혼이라도 있는 겐가. 대체 어디로부터 끝없이 내려와 이처럼 사람을 심란하게 하는가. 눈은, 낭만을 주고 하얀 마음이 되게 하고, 별 조각처럼 흩어진 하얀 추억들을 불러낸다. 눈이 내리면, 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잊히지 않는 과거 일들이 떠오른다. 젊은 날 눈처럼 하얗고 순수했던 내 몸짓들이 생각난다.

 얼굴 한 번 못 본채 첫사랑을 보내고 가슴이 허허롭던 그해 겨울이었다. 그날따라 동전만한 눈이 종일 비처럼 퍼부었다. 약속한 적 없으나 누구라도 만날 것만 같아 집을 나섰다. 그날 밖으로 나오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으니, 세상을 하얗게 덮은 눈 때문이었다. 장터 빵집 '맛나당'에 들어섰다. '어? 이게 누구야. 이렇게 만난 행운은 눈이 주는 선물이야!' 한 남자 선배가 오버액션을 하며 다가와 반겨줬다.

 예나 지금이나 눈은 나를 낭만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기역자로 생긴 난로 함석 연통에 두 손을 녹인 후, 그와 마주 앉아 성냥개비를 쌓으며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나눴다. 탑처럼 쌓다 허물어지면 큰소리로 웃곤 했다. 무슨 대화를 했는지 생각나지 않지만 제법 진지하게 주고받았던 것 같다. 마음을 주고받는 연인 사이가 아니어도 그날 그와 이야기하면서 허허로운 마음을 조금 정도 채울 수 있었다.

 어느 해 겨울엔 이런 일도 있었다. 그날도 종일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자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시내버스를 타고 청주로 나와 영화 한 편으로 마음을 채우고 나오니, 눈이 그치지 않는 거다. 거리를 배회하다 어느 음악다방으로 들어갔다. 쪽지에 듣고 싶은 곡을 적어 디스크자키에게 건네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 마지막 버스를 타게 됐다. 난 차창너머로 마구 눈을 쏟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청주에서 오십여 리쯤 되는 내 고향으로 가던 시내버스가 척산 쯤 갔을 때였다. 길이 미끄러워 더 이상은 못 간다면서 노상에 승객들을 내려놓더니 인정 없이 그냥 가버리는 거다. 사람들이 순하던 시절이었다. 버스기사 판단으로 예기치 않게 노선을 중단했음에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여기까지 데려다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라고 인사를 하는 이도 있었다.

 폭설로 버스가 더 이상 못 간다는 이유가 오히려 낭만으로 여겨졌다. 부모님께는 늦어도 괜찮은 확실한 핑계가 생겼고, 이름은 모르지만 함께 타고 온 승객 중 낯익은 청년도 있어서다. 그러고 보니 젊은 사람은 그와 나 둘뿐이고 모두 어른들이다. 말을 해본 적은 없지만 설원을 함께 걷는 일은 영화 같은 일이라면서 설레기까지 했다. 달빛에 반사돼 하얗게 빛나는 끝없는 눈길을 사람들은 터벅터벅 걸었다.

 부지런히 걸어도 보폭이 작은 나는 뒤처졌다. 손목시계 바늘은 자정을 넘겼다. 나보다 몇 걸음 앞서 걷는 그의 어깨 위로 달빛이 쏟아진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가 가다서고 가다서고를 반복한다. 아마도 맨 뒤에 처진 나를 의식하는 것 같다. 그럴 바엔 이야기라도 나누며 나란히 걸을 것이지 무심도 하다. 길가의 나무들이 귀신처럼 보인다. 푸다닥하고 새가 날면 머리카락이 일어섰지만 소리 지를 순 없다.

 그는 내가 출근할 때마다 장터기와집 대문에 서서 바라보곤 했던 사람이다. 시선이 마주치면 얼굴을 붉혀서 설렘을 주더니 오늘은 목석처럼 말을 잊어 버렸나 보다. 그는 내게 말을 걸고 싶은 의향은 없는 듯 했다. 아니 뒤에 따라 가고 있는 것조차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끝내 아무런 말도 걸어오지 아니했다. 그렇게 침묵할 거면서 그동안 무슨 이유로 출근하는 나를 종종 바라보고 있었을까. 그 집 앞을 지날 때면 옷매무새와 머리를 만지며 도도한 표정으로 지나곤 했는데 말이다.

 굵어지는 눈발을 보며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그때, 내가 먼저 말을 붙여 볼 걸 그랬나 보다. 그랬더라면 그와 나란히 걸었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백설 뒤집어쓰고 서있는 길가 나무들이 무섭지 않았을 건데 말이다. 살을 에는 추위도 한 결 덜 느꼈을 건데 말이다. 꿈처럼 그런 상황이 다시 온다면 용기 내어 내가 먼저 말을 걸 수 있을까? 지난시간을 되돌릴 순 없지만 백설白雪 낭만 추억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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