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준 은사님의 퇴임에 부쳐

2019.03.24 14:33:20

김병규

전 상당고 교장·교육학박사

살면서 고마운 분이 한 두 분이 아니랴만 나의 삶에 많은 도움을 주신 분 가운데 한 분이 이해준 교수님이시다. 이 분은 고등학교와 대학 선배에다 대학 때 은사이나 배움이 큰 때문에 선배라기보다는 은사님이라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역사과 4년 선배로 이미 서울대 대학원에 입학하고도 나에게 부러 찾아와 고등학교 후배가 역사과에 들어와 반갑다 인사하여 첫 만남으로 뵈었다. 얼빵한 신입생의 눈에 비친 모습은 훤칠한 키에 활달하며 매사에 자신이 있었고 특히 배구를 잘 하여 약간의 짬이면 코트에서 후배들과 같이 운동을 하는 소탈한 성격이셨다. 후일 교사가 되어 학교 대표로 배구대회에서 뛸 수 있었고 운동장에서 학생들과 같이 운동을 하게 된 것은 선생에게 배운 바였다. 사실 전에는 배구에 어줍었는데 이 선배에게 교사들이 직원체육시간에 배구를 많이 한다는 말을 듣고는 점심시간을 활용하여 체육과 동기들에게 배구를 배웠더랬다. 그 결과 이 친구들에게 배운 스파이크와 더불어 블로킹을 체육 전공자만큼 잘 하게 되었다. 초임지인 괴산중에서 괴산여중고와 괴산고 3개교가 친선 체육대회를 돌아가며 하는데, 젊고 빠른지라 수비 범위도 넓고 스파이크 포지션으로 괴산고 처녀 선생의 눈에 들어 총각 신세를 면하게 되었으니 대학 때 배운 배구가 인생의 소중한 보물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대학 3학년 때 이 선배님을 강의실에서 다시 뵈었다. 그 때 강좌가 실학이었는데 담헌 홍대용에 대하여 제출한 보고서에 붉은 글씨로 평을 달아 다시 받아본 충격! 이제껏 내 글을 이리 자세히 봐 준 분은 처음이었으며 인용 부분과 제출자의 생각 차이점의 명쾌한 지적에 혀를 내 두르게 되었다. '시대의 전환기에 지식인들은 어떤 생각으로 처신했을까·' 하는 명제도 이때 생겼다. 그 공부 결과를 정리하여 조선 후기 마지막 실학자로 일컬어지는 최한기 관련의 박사논문 제목을 정하게 되었으니 기이하다.

운동을 즐기는 것 까지는 좋은데 휴일이면 어슴푸레한 새벽에 테니스 라켓을 메고 나가 어두운 밤에 들어오는 것이 비일비재하니 어느 마누라가 좋아하겠는가. 아내의 비방(祕方)은 잔소리 대신에 박사학위 응시원서를 슬쩍 던져놓고 하회를 기다리는 거다. 여기에 걸려들어 박사코스를 시작하여 우여곡절 끝에 사회 사상사 분야로 졸업 심사에 부쳐질 수 있었다. 외부에서 심사위원 두 분을 모시는 김에 석사 지도교수이셨던 당시 충남대 정덕기 총장님과 학부 때 실학 강의를 해 주신 이해준 교수님께 부탁을 드렸다. 다섯 분이 한 챕터씩 맡아 심사를 하는데 이 교수님은 다른 분보다 한 두 시간 먼저 오셔서 차 안에서 당신의 몫 외의 다른 심사위원 분담의 논문까지 문제점을 꼼꼼히 지적하고는 예상 질문에 대한 답까지 마련해 주셨다. 속내를 알지 못하는 다른 분들이 보기에는 다대한 수정 지시를 기일 내에 완결해 오는 것이 신기할 밖에. 미둔한 내가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 선생님의 따스한 지도 덕분이다.

이 뿐인가. 고교 국정 교과서를 집필할 수 있게 된 것도 당시 국사편찬위원회 편수부장으로 계시던 선생님 덕이라. 한강 이남의 유일한 집필자라는 것보다 더 기뻤던 것은 모든 역사 전공자의 로망이요 등용문인 국편을 출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국편을 2년 동안 드나들며 장득진 연구관도 사귀게 되었으니 이 또한 선생님께 감사할 일이다.

이제 세월이 흘러 제자가 먼저 퇴임을 하고, 금년 2월에 선생님도 대학 강단에서 내려오시어 뜰에 핀 매화꽃 향기를 맡게 되셨다. 마침 올 4월 9일부터 21일까지 열리는 퇴계선생의 마지막 귀향길 450주년 재현 행사가 열린다. 귀향길 한 구간인 충청권 지역이라도 선생님을 모시고 걸으며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를 표하리라.

나에게 따스한 정으로 추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거다. 다른 사람에게 나도 그렇게 기억된다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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