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 함께하는 여름의 향기 - 어머니의 공책

2023.08.17 16:51:55

내가 어릴 적에 어머니는 우리가 원하면 무엇이든 가져다주고, 맛있는 음식도 금세 만들어주셔서 요술을 부리는 줄 알았다. 밤낮없이 일만 하시는 어머니가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을 본 적이 없어 글을 모르는 줄 알았다. 그렇게 철없는 생각을 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한 달이 더 지났다. 불현듯 솟아오르는 슬픔을 억누르느라 칠 남매 중, 누구도 먼저 유품을 정리하자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저 아버지 눈치만 보고 있었다.

어느 일요일 새벽, 마음먹고 어머니 집으로 갔다. 어머니 물건을 정리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집 안 구석구석을 돌아보니 모두가 어머니 손길들이라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가 옷장을 열어보니 칸칸이 말끔하게 정리된 옷들이 어머니의 외출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주인 잃은 옷을 하나하나 살펴보니 사연이 담긴 것들이라 어머니의 추억과 체취를 느끼며 눈물이 났다. 그날, 옷을 정리하며 어머니의 정까지 모두 버리는 것 같아 가슴이 너무 아리고 아팠다.

다 버렸나 싶었는데 방 한쪽 구석에 있는 화장대가 보였다. 화장대 서랍을 여니 잘 정리된 물건 위에 놓인 공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파란색 그림이 그려져 있는 초등학생들이 쓰는 칸이 넓은 줄 공책이었다.

공책을 펼치니 큰집, 작은집 대소사는 물론 형제들의 생일과 당신 손주들의 생일까지 세세하게 기록돼 있었다. 큰집의 조카들과 조카며느리들의 생일까지도 모두 적어 놓으셨다. 그야말로 가족의 역사를 기록해 두신 우리 집안의 보물 같은 공책이었다. 공책 속에는 아버지와 함께 제주도에 다녀오시고 써 놓은 기행문도 있었다. 늘 바쁘게 일하는 모습만 보았는데 어머니는 언제 이런 글을 다 쓰셨을까. 제주도에서 본 그 많은 것 중 유채꽃이 제일 곱더라고 써 놓은 소박한 어머니 마음에 코끝이 찡했다.

그 글을 읽고 또 읽으며 고단했던 어머니의 생활에 도움이 되지 못했던 딸이기에 울고 울었다.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해 피곤하실 텐데도 늦은 밤 글을 쓰시던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혹시, 어머니 마음도 헤아리지 못하는 딸에게 서운한 생각을 하시지는 않았을지. 칠남매나 되는 자식을 두셨지만, 어느 자식 하나가 어머니 마음을 살피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공책을 한 장 더 넘기니 가수 전미경 씨가 부른 '장녹수'라는 노래 가사가 2절까지 적혀 있다. 사는 동안 나는 어머니가 노래 부르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다. 아니 콧노래를 흥얼거리신 적도 없었다. 그런 어머니가 노래 가사를 적어 놓으셨다니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노래 가사를 읽어 가는데 자꾸 눈앞이 뿌옇게 흐려진다. 마치, 어머니의 인생을 그려놓은 것처럼 절절한 노랫말에 손가락으로 밑줄을 그어본다. 어머니도 이 노래 가사가 당신의 삶과 닮았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이 노래가 좋아서 적어 놓았을까. 어머니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지만, 어머니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 같아 공책을 덮을 수가 없었다.

누구에게도 터놓고 하소연할 수 없었던 노년의 외로운 삶을 글로라도 풀어내려고 애쓰셨던 어머니. 자식들 때문에 당신 생각은 하지 못하고 사셨던 어머니의 삶이 절절히 느껴져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어머니의 인생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린다. 어머니는 평생 무슨 낙으로 사셨을까.

어머니 마음이 담겨있는 공책을 가슴에 안고 돌아왔다. 어머니를 만난 듯 가끔 꺼내 보려고 가져왔는데, 그날 저녁 아버지는 공책을 가져오라고 불호령을 내리셨다. 아버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신 듯했다. 적적한 밤이면 아버지는 텅 빈 집에서 어머니 생각에 눈물지으시며 밤마다 읽어보던 공책이라고 하셨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나니 가슴이 철렁했다. 혼자 계시는 아버지가 아직도 어머니의 빈자리를 힘들어하신다는 생각에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것 같아 죄스러웠다.

어머니가 써 놓은 노랫말처럼 어렵고 힘들게 살면서도 마음대로 떠날 수도 없었던 어머니가 지금은 하늘나라에서는 좀 편안해지셨을까. 조금 더 일찍,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공책을 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내가 어머니한테 글쓰기 편안한 새 공책을 선물해드렸을 텐데. 아니, 공책을 함께 공유하며 어머니 삶을 조금이라도 더 즐겁게 해드렸을 텐데. 살갑게 딸 노릇 하지 못한 것이 더욱 후회스러웠다.

오명옥

푸른솔문학 신인상 수필 등단

푸른솔문학 키페문학상 수상

'목련이 필 때면', '가을을 걷다' 등 공저



이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

<저작권자 충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93건의 관련기사 더보기




충북일보 / 등록번호 : 충북 아00291 / 등록일 : 2023년 3월 20일 발행인 : (주)충북일보 연경환 / 편집인 : 함우석 / 발행일 : 2003년2월 21일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무심서로 715 전화 : 043-277-2114 팩스 : 043-277-0307
ⓒ충북일보(www.inews365.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by inews365.com, I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