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 함께하는 가을동화 - 촛불을 켜고

2023.10.05 16:36:07

어머니가 그리운 날이면 촛불을 켜고 싶다. 나는 철없는 딸이었다. 속내를 드러내지도 않고 무심하게만 보이는 어머니가 야속하여, 불평불만이 많았다. 얼마나 걱정이 되셨으면 혼수를 장만하시면서 내게 좋은 촛대를 꼭 사주고 싶다고 하셨을까. 불현듯 어머니의 촛대에 촛불을 밝히고 싶었다.

첫날밤을 밝혔던 촛대를 꺼내 닦아 선홍빛 초를 꽂고 불을 당겼다. 백합꽃을 좋아하셨던 어머니의 온화한 미소가 어른거리고 "잘 살아라" 하시던 음성이 귓가를 맴돈다.

결혼식을 하고 바로 시댁으로 들어가 폐백을 올리고 새댁 노릇으로 하루를 보내고 처음으로 생긴 내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자그마한 화장대 위에 선 삼단 은빛 촛대에 꽂힌 선홍 촛불이 방안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어서 오렴. 힘들었지!" 나는 그만 '어머니!' 하고 털석 주저앉았다. 멍하니 촛불을 바라보며 흐르는 눈물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시집가면 친정에 올 생각을 하지 말아라" 하시던 말씀이 서럽고 야속했다.

어머니는 내게 집안의 빛이 되라고 딸의 신방을 촛불로 밝혀 주고 싶으셨나 보다. 촛불은 소원을 담고 근심 걱정을 해소하며 축하와 행운의 뜻이 있다고 했다. 모두가 잠든 이 밤, 어머니는 지금 무얼하고 계실까.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실까. 딸 걱정에 잠 못 이루고 뒤척이고 계실까. 신혼의 달콤한 꿈에 빠진 큰딸의 첫날밤을 상상하며 행복해 하실까.

단정하고 흐트러짐이 없으신 어머니는 짧은 옛이야기나 속담, 수수께끼를 즐겨 들려주시는 지혜로움으로 우리를 가르치셨다. 딸이 많으니 항상 조심스럽고 걱정스러움에 노심초사하신 속 깊은 어머니의 사랑을 어찌 다 헤아릴 수가 있을까. 어머니는 하루를 항상 기도로 여셨다.

너희도 아버지 같은 신랑을 만나면 좋겠다고 늘 말씀하시던 어머니. 금실이 좋으신 부모님의 모습은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했다. 아버지께서 갑자기 심장마비로 소천하시자 어머니는 건강을 잃고 외롭고 허약한 심신의 고통으로 병원을 전전하며 10여 년을 고생하셨다. 집은 허술해도 병원이 가깝고 교통도 편리하여 편해하시는 어머니를 모셨지만, 겨울이 오면 외풍이 심한 허름한 집이라 새로 짓기 전까지, 여건이 좋은 인천의 여동생이 모시기로 했다.

어머니를 배웅하고 돌아와 나는 그만 터지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전화 받침 아래 살짝 넣어두고 가신 하얀 봉투 '집 잘 짓고 너의 내외 만수무강하여라. 엄마 두 손 모아 빈다.' 가슴이 뭉클했다. "어머니!" 송수기를 들고 울먹이는 내게 "나는 좋기만 한데 애처럼 왜 울어. 돈은 필요한 사람이 쓰는 거여. 난 이제 돈이 소용없어. 울지 말아" 다독이며 어루시는 모정이 나를 더욱 슬프게 했다.

새집을 마련했을 때 어머니는 "참 잘했다. 축하한다"는 말씀뿐 오실 수가 없었다. 위독하시다는 전화에 달려간 병실에서 산소마스크를 쓰신 얼굴에 "엄마아!" 얼굴을 맞대고 불러도 대답이 없으시다. 자애로우신 눈빛을 단 한 번이라도 뵈었으면 원이 없을 것만 같았다. "외롭다. 사람이 그립다. 너의 집에 가고 싶다" 하시던 말씀이 귀에 쟁쟁하다. 마음을 진정하고 어머니 가슴에 손을 얹고 흐느끼며 성가를 조용히 부르던 날이 회상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길이다. 장례미사와 촛불 고별예식으로 어머니가 하늘나라에서 참 평화와 행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는 없었다. 한 생의 무거운 짐을 벗어놓고 불길을 따라 하늘로 오르시는 어머니의 초연한 모습이 서러움보다 편안함으로 다가왔다.

촛불은 어머니의 기도를 담았나 보다. 어려움도 근심 걱정도 잊게 하는 치유의 신비가 나를 다독인다. 어머니와 함께하던 말놀이며, 윷놀이, 전통 꽃 맞추기로 환하게 웃으며 즐거워하시던 고우신 모습이 불빛에 어른거린다.

"어머니! 어머니처럼 기도하고 사랑하고 보듬으며 잘 살겠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참 평화와 영원한 복락을 끝없이 누리소서" 가만히 손을 모은다.

권명자

푸른솔문학 수필 등단

푸른솔문인협회 회원

천주교 청주교구 주보 '깊은골짝 옹달샘' 집필

충북여성문인협회 작품공모 최우수상

저서 '그분 마음에 들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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