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 함께하는 여름의 향기 - 울림

2024.06.19 16:16:20

어렸을 적 고향 마을 야트막한 앞산은 '굴바위 산'으로 불리었다. 물론 원래의 이름이 있다는 것은 고향마을을 떠나고 나서도 한참 후에 알았다.

어느 날인가 혼자 앞산 등성이를 걸어 오르는데 발을 디딜 때마다 발밑에서 '통통' 소리가 나길래 일부러 걷는 내내 콩콩 뛰면서 신기해했었는데, 아마도 사람들에게 불리는 이름처럼 바위로 이루어진 굴이 많아서 땅울림이 있지 않나 생각하며 어딘지에 있을 굴을 찾으려 했던 아련한 기억이 있다.

햇볕이 추위를 녹여 내리는 봄날이 되면 산골 소년은 종종 뒷산에 올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디인가에 있을 바깥세상을 그리고는 했다.

산언덕을 오르면 서쪽으로는 아스라하게 서해바다가 해무에 싸인 듯 보이고 동쪽 산등성이 너머로는 저 멀리 천안역에서 들려오는 기적소리가 '빠~앙'하고 메아리쳐 오면 그 희미하게나마 들리는 소리는 산골 소년에게는 문명이 있음을 전해주는 메아리였고 또 바깥세상으로 나아갈 희망의 울림이었다.

시간이 흘러 직장생활에 지쳐갈 즈음 마음의 짓눌림을 덜어내고자 꽃 문살이 아름다운 부안에 있는 내소사 템플스테이 행사에 참여한 적이 있다.

저녁 공양을 마치자 산골짜기는 칠흑의 어둠으로 변했고, 저녁 예불의 독경 소리만이 고요한 경내를 채울 때 범종 타종을 위해 종각에 오르니 어둠 속에서 위압적으로 다가오는 범종에 그만 타종할 엄두가 나지 않아 멈칫 뒷걸음질을 했다.

이에 스님이 낮은 목소리로 한 말씀 하신다. 어여 종루의 당목을 힘껏 잡아당겨 치라고, '둥~웅' 이내 고요한 밤공기에 귀가 울리고 가슴이 울리는데 그동안 얼마나 많이 쌓인 설움이 삭아지는지 그만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렸던 기억이 있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영화 중 2004년도에 만들어진 닉 카사베츠 감독의 '노트북'이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는 어느 요양원을 배경으로 치매에 걸려 기억을 잃은 여인에게 매일같이 남편이 책을 읽어주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여인은 남편이 매일 읽어주는 젊은 시절의 노트 글을 들으며 종종 기억이 돌아올 때면 지나온 날들을 회상하며 살다가 부부가 같은 날 생을 마감하는 이야기로 서로에 대한 변치않는 사랑을 보여주어 보는 내내 마음 울림이 컸던 영화로 기억하고 있다.

얼마 전 청주에 내려와 지내게 됐을 때 휴일이면 홀로 근교 암자를 찾아다니며 시간을 보내고는 했는데, 어느 날 들른 암자가 어디선 들어 본 듯한 '화장사'였고 바로 김홍은 작가의 수필 '가침박달'에 나오는 절이란 것을 알게 됐다.

수필은 화장사 젊은 여승의 미소에 반해 다시 찾지만 어디에서도 그 젊은 여승의 미소를 볼 수 없어 안타까워하는 애잔함이 읽는 내내 가슴에 울림으로 전해져 왔었다.

얼마나 그 젊은 여승의 미소가 마음에 와닿았으면 가침박달 꽃봉오리와 같이 방울방울 피워내던 미소라 했을까, 얼마나 그 젊은 여승이 그리웠으면 가침박달나무 꽃가지를 꺾어다 주는 환상을 보았을까 자못 궁금하기도 해 찾아봤으나 어디에도 그 젊은 여승은 보이지 않았다.

울림은 그 형태나 방식이 매우 다양하다. 물리적 울림이 있으면 정신적 울림도 있고, 공간적 울림이 있으면 시간적 울림도 있다. 또 남에게 주는 울림이 있으면 내가 받는 울림도 있으며, 동시에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울림도 있다. 또한 여러 형태의 울림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울림도 있다.

어릴 적 굴바위 산의 땅울림은 물리적 울림이요, 기적 소리는 공간적, 시간적 울림이다. 또한 내소사 범종의 타종은 공간적, 정신적 울림이며 동시에 주는 울림과 받는 울림이 복합적으로 존재하는 울림이고, 영화 '노트북'에서와 수필 '가침박달'에서의 울림은 정신적 울림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우리의 삶 속에는 여러 종류의 울림이 존재한다. 그 울림은 누군가에게는 아련한 기억이 되고 또 누군가에게는 마음의 병을 치료해 주는 약이 되기도 하며, 누군가에게는 살아갈 희망이 되기도 한다.

이웃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삶 속에서 나는 과연 울림을 주는 사람인지 다시 한번 되돌아본다.

異邦人(이방인) 정상진

서울시 퇴직

효동문학상. 충북 도민백일장 대상

저서: 내 딸의 학습여정(2016), 미류나무(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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