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팽년 사우가 충주에 위치한 까닭

2010.03.24 19:38:24

조혁연 대기자

박팽년은 사육신 중에서도 주모자급에 속한다. 사육신은 처음에는 명나라 사신 환영회가 벌어지는 창덕궁에서, 별운검 유응부 등을 시켜 세조를 습격하려 했다. 그러나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별운검이 배치되지 않으면서 거사가 미뤄진다. 별운검은 임금이 거둥할 때 칼을 차고 좌우에서 호위하는 벼슬아치를 말한다.

박팽년 등은 두 번째 거사일을 '권가'가 개최되는 날로 연기한다. 권가는 씨뿌릴 때쯤 열리는 친농의식의 하나로, 전례적으로 임금이 직접 주재했다. 그러나 거사 직전에 김질이라는 인물이 역모 사실을 밀고하면서 참여했던 사람들이 모두 붙잡힌다.

당시 박팽년이 세조를 '상감'이 아닌 '나으리'로 부른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대가는 혹독했다. 사실상 가문의 대가 끊기는, '멸문지화'를 당한다. 아버지 박중림과 박팽년의 다섯 형제, 그리고 아들 3명 등 9명이 극형을 당했다. 그리고 어머니, 처, 제수는 노비로 강등돼 고된 삶을 살아야 했다. 대신 김질은 한명회, 신숙주 등과 함께 영달을 누린다.

그런데 당시 세조의 분노는 생각보다 훨씬 심했다. 박팽년은 혹독한 고문 때문에 국문을 시작한지 7일만에 옥중에서 죽었다. 그럼에도 세조는 "시체를 거열(車裂) 하고, 그 목은 베어 저자거리에 효수하라" 명했다고 실록은 쓰고 있다. 이때의 거열은 다리를 두 개의 수레에 각각 묶어 수레를 움직이게 하는 형벌을 의미한다.

그러나 멸문을 당한 박팽년 집안에서 단 1명이 살아 남았다. 전해지는 얘기에 의하면 박팽년의 제수는 사건직후 신분이 관비로 강등돼 경북 달성현감의 친정댁으로 가게 됐다. 이때 그녀는 임신 중으로, 당시 조정에서는 "남자 아이면 죽이고, 여자 아이면 살려주라"고 명한다. 출산을 한 결과,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거의 같은 시기에 현감 친정댁의 몸종은 딸을 낳게 된다.

이때 달성현감의 묵인아래 두 아이를 바꿔치기 했고, 그래서 단 1명의 피붙이가 살아남아 대구에서 집성촌을 형성하게 된다. 그 피붙이는 17살 때까지 '박비'라는 이름의 노비로 살았다. 이후 박팽년 가문이 복권된 후 양반 지위를 되찾게 된다. 이름도 '박비'에서 '박일산'으로 바뀌었다고 문중야사는 쓰고 있다.

박팽년은 대전 회덕 출신이고, 후손 집성촌은 대구에 형성돼 있다. 그런데 박팽년 사우는 충주 신니면에 세워져 있다. 여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박팽년의 부인은 천안전씨다. 실록을 보면 그녀의 본명은 '전옥금'으로, 역모사건 후 연좌제로 인해 정인지 집안의 노비로 팔려갔다.

그런데 그녀의 묘는 박팽년 사우와 매우 가까운 충주 주덕읍 덕련이라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그녀의 친정이 주덕 덕련이었을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이것이 맞다면 박팽년은 일시적이나마 충주에서 처가살이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박팽년 부인의 묘소를 돌보기 위해 대구에서 문중 일부가 올라왔고, 이후 영조 때 박팽년 사우가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충주 주덕읍에서 서울 방향으로 차를 몰다보면 신니면이라는 곳이 나온다. 이 신니면소재지에서 우회전을 하면, 박팽년 사우가 있는 수청 마을에 도달할 수 있다. 도기념물 제 27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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