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다 영의정, 진천 최석정

2010.03.29 19:39:27

조혁연 대기자

서리를 제외하고 정부수립 후 현재까지 총 40명의 총리가 배출됐다. 현 정운찬 총리가 40대에 해당한다. 이중 장면, 백두진, 김종필 씨는 총리직을 두번씩 수행했다. 장면은 2, 7대 백두진은 4, 10대 김종필은 11, 31대 때 총리직을 수행했다.

지역감정 여부를 떠나 충북은 계속 '총리 무배출道'로 남아 있다. 반면 군장성이 많았던 이북 출신은 4공화국까지 총 10명의 총리를 배출했다. 그 다음은 서울 7명, 전북 5명, 충남 5명 등이 뒤를 잇고 있다. 반면 전남, 충북, 제주는 지금까지 1명의 총리도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제주는 박충훈 씨가 4공화국 때 총리서리직을 수행했으나 정식 총리는 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고장 진천 출신이면서 조신시대 때 지금의 총리에 해당하는 영의정을 무려 8번 역임한 인물이 있다. 바로 최석정(崔錫鼎·1646~1715)으로, 단연 조선시대 최다 영의정이다. 병자호란때 주화파로 잘 알려진 최명길이 그의 할아버지가 된다.

그가 어떻게 8번이나 영의정에 올랐는지는 사료로는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 다만 숙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총명하고 박식했으나 주장하는 논리는 그다지 각박하지 않았다'. 이로 미뤄 그가 온후한 성격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할아버지 최명길 영향을 받아 이념적으로는 양명학, 정치적으로는 소론계에 속했다. 익히 알다시피 소론은 노론과 뿌리가 같은 서인계열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끝나자 그 책임을 둘러싸고 두 붕당은 사상적인 대립을 벌인다.

이때 윤후 등 양명학을 추구하던 일부 학자들은 "어찌 세상의 이치를 주자만 알 수 있는가"라고 성리학을 공격하면서 갈등이 고조된다. 그러던 중 갑술환국으로 실각한 남인들의 문책 수위를 둘러싸고 서인 강경파는 노론, 온건파는 소론으로 완전히 갈라진다.

따라서 소론의 길을 줄곧 걸은 최석정은 교조적인 노론계와 달리 국어, 수학과 같은 비성리학적인 분야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그가 남긴 저서중 한글을 연구한 것으로 '경세정운도설'이 있다. 이 저서는 한글을 음운학적으로 연구한 것으로, 주시경 선생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또 '구수략'이라는 저서는 그를 조선시대 5대 수학자의 한 명으로 만들었다.

그런 최석정 선생이 진천으로 낙향한 것은 장희빈 때문이었다. 장희빈은 숙종의 아이를 갖게 될 무렵, 궁궐 안에 몰래 무당집을 차려놓고 정비 인현왕후의 죽음을 빌게 된다. 이 것이 발각되자 최석정은 왕자(후에 경종)의 생모인 점을 감안해 극형만은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최석정의 주장은 수용되지 않았고, 대신 고향 진천으로 낙향하게 된다.

이때 세워진 것이 '태극정'이라는 강학공간이고, 후에 그의 제자들이 그 자리에 지산서원을 세웠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권좌에 오르자 중앙집권 강화책으로 서원 철폐를 단행했고, 이때 충북의 유일한 소론계 서원인 지산서원도 철폐됐다.

다만 지금 그 자리에는 '서원말'이라는 표지석이 서있어 과거 지산서원이 있었던 곳임을 알려주고 있다. 서원말은 지산서원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최석정의 묘는 지산서원 터에서 가까운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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