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과 수암, 호가 돌림자인 까닭

2010.04.26 20:15:48

조혁연 대기자

비례부동(非禮不動),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 옥조빙호(玉藻氷壺), 만절필동(萬折必東), 충효절의(忠孝節義). 괴산 화양구곡에 암각 글씨로 새겨진 표현들로, 모두 우암 송시열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이중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는 뜻인 비례부동은 첨성대 초입에 새겨져 있다. 첨성대는 화양구곡 제 6곡에 해당한다. 바로 옆에는 숭정황제어필(崇禎皇帝御筆)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비례부동 글씨를 쓴 인물이 숭정황제임을 알게 하고 있다. 숭정은 명나라 의종(毅宗)의 연호이다.

우암이 중국의 여러 황제 중 유독 명나라 의종의 친필을 화양동에 새긴 것은 궁금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수암 권상하가 스승 우암의 유언을 받들어 세웠던 만동묘에는 명나라 의종 외에 신종의 위패가 봉안됐다. 신종은 주색에 빠져 정사를 잘 돌보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대신 환관들이 정사를 대신 봐주는 환관정치가 판을 쳤다.

그러나 신종은 조선전쟁, 즉 임진왜란에 대해 관심이 무척 컸다. 사가에서는 그 이유를 이른바 '속방' 개념으로 보고 있다. 이는 속국과는 다른 개념으로, 중국은 천자의 나라가 되고, 주변국은 그 천자의 권력을 존중하는 질서에 따라 외교관계를 맺고 교역을 한다. 여기서 나온 개념이 조공무역이다. 이 속방 개념에 따란 신종이 조선을 도왔다고 사가들은 말하고있다. 그 결과, 명나라 신종은 임진왜란 종전 후 조선으로부터 '재조지은'(再造之恩)의 소리를 듣는다. 나라를 새롭게 세울 정도의 은혜를 받았다는 뜻이다. 신종 위패는 이런 이유로 만동묘에 봉안됐다.

명나라 의종의 위패가 만동묘에 봉안된 사연은 신종과는 다르다. 죽음, 그것도 자결과 관련이 있다. 농민반란군 지도자 이자성은 1644년 지금의 서안에서 '대순(大順)'이라는 나라를 건국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그리고 곧바로 북벌을 시작해 그해 4월에 북경 인근에 도달했다. 이에 신하들이 남경으로 천도할 것을 권했지만 의종은 반대한다. 신하들이 속속 투항했고 4월 25일 북경이 함락됐다. 그러자 숭정제 의종은 처첩과 딸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

우암은 이 부분을 높이 산 것 같다. 충북대 우암연구소 김용남 전임연구원이 송자대전을 번역했다. 송자대전은 송시열의 문집을 의미한다.

송자대전 권1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나라가 망하면 임금이 죽는 것은 고금에 말뿐이었는데, 우리 황제 홀로 이 일을 판단했으니, 천지가 무너져도 썩지 않으리라'(國亡君死之 古今徒騰口, 吾皇獨辨此, 天壤壞不朽). 의종을 '우리 황제'(吾皇)라고 칭하는 부분이 매우 인상적이다.

우암은 명나라 의종의 자결이야 말로 바른 도리, 곧 예를 실천한 것이요, 비례부동의 정신을 현실에서 실천한 것으로 생각했다. 의종의 친필인 '비례부동' 글자는 민정중(1628~1692)이라는 인물이 북경에 갔을 때 받아왔고, 이것이 다시 우암에게 전달되면서 괴산 화양구곡에 새겨졌다. 우암은 비례부동 글자를 화양구곡에 새기고 다음과 같은 한시를 남겼다. '다행히도 황제께서 남긴 필적 얻으니 / 하늘 향기 젖어 있고 봉황새 나는 듯 / 돌아와 화양동에 새기고 / 호위는 삼승의 중들에게 부탁했네'. 이때의 중은 스님들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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