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 '절친' 보은출신 김정

2010.04.28 19:00:37

조혁연 대기자

얼마전 충암 김정(金淨)의 후손들이 충암이 남긴 고서와 고문서를 국립청주박물관에 기탁했다. 기탁 목록에는 김정의 문집인 충암집, 조광조의 문집인 정암집, 만동묘정비 탁본, 경주김씨족보 초고본, 송시열이 제주도에 지은 농맹혹문정의통고 등이 포함돼 있다.
 
김정은 1486년 지금의 보은읍 성족리에서 태어나 그의 나이 21살인 1507년(중종 2) 문과에 장원 급제,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그러나 사약을 받고 짧은 생애를 살았기 때문에 지역에서는 일부 한문학자를 제외하고 그를 크게 주목하지 않아 왔다. 그러나 그는 지금 식으로 표현하면 명현 조광조와 '절친'의 관계였다. 따라서 중종 때의 개혁 정책은 거의 두 사람에 의해 주도됐다. 도교를 관장하는 관청인 소격서(昭格署)가 이때 폐지됐고, 대신 숨은 인재를 천거 형식으로 선발하는 현량과(賢良科)가 도입됐다.

 특히 그는 '국왕도 현인·철인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수기(修己), 즉 자기수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현철군주론이라고 한다. 그는 연산군의 학정이 군주의 자질미달 때문에 빚어진 것으로 생각했다.
 
훈구파의 반격이 시작됐다. 중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유학(幼學) 윤세정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러하였다. 조광조, 김정 등 4인이 권세 있는 자리를 나누어 차지하여 노성(老成)한 사람들을 배척하고 후진을 끌어들여 요로에 벌여 놓았다'. 이때의 노성은 자신들, 즉 훈구세력을 일컫고 있다.
 
주군 중종과의 사이에도 서서히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역시 중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접때 조광조, 김정 등이 서로 붕비가 되어 자기에게 붙는 자는 천거하고 자기와 뜻이 다른 자는 배척하니 그 죄가 크다'. 두 사람이 숨은 인재를 찾기위해 도입한 현량과 제도를 중종이 대놓고 비판하고 있다. 이때의 '붕비'는 붕당을 만들어 자기를 두둔하는 행위를 말한다.
 
얼마안가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기묘사화는 남곤 등 훈구파 세력이 나뭇잎에 이른바 '走肖爲王'(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뜻)이라는 글자를 인위적으로 연출, 이를 계기로 조광조, 김정 등 신진사류가 대거 숙청된 사건을 말한다.
 
김정은 이별을 앞두고 조광조에게 다음과 같은 영결시를 적어 준다. '重泉此夜長貴客空留明月照人間'. 의역하면 '오늘 밤이 곧 황천길이지만 그 정신만은 저 하늘의 보름달처럼 인간에 빛나리' 정도가 된다. 그는 중간에 죄가 감해져 충남 금산으로 유배됐으나 도중에 고향의 병중 어머니를 찾아뵙고 왔다는 이유로 망명죄가 추가됐다. 때문에 제주도로 보내진 후 그곳에서 사약을 받았다. 그의 나이 34살이었다.
 
그는 중종이 내린 사약이 도착하자 '안색하나 변하지 않고 술을 가져오게 한 후 이를 흔쾌히 마시고 죽었다'(顔色不變 呼酒快死)고 '기묘록보유'라는 사서는 적고 있다. 그는 사약을 마시기 직전에 한국한문학사에 빛나는 절명시 하나를 남긴다.
 
'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버려져 외로운 혼이 되는구나 / 자모를 버렸으니 천륜이 막혔어라 /이런 세상만나 이몸 죽으니 /…/ 천추만세토록 응당 나를 슬퍼하리'. 보은 상현서원, 청주 신항서원, 금산 성곡서원, 제주 귤림서원 등에 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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