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드라마 유감

2010.08.11 18:06:17

이경미

충북여성단체협의회 사무처장

TV 속의 세상은 참으로 놀랍다. 불가능이 없는 세상이다. 현실에선 불가능한 일들을 실현시켜 한계를 초월한 짜릿함을 선물하기도 하고, 잃어버린 꿈과 사랑을 되살려 기억의 저편에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을 콕콕 찔러 애간장을 녹이기도 한다.

이렇게 무한한 가능성과 시대를 넘나드는 흥미진진한 스토리들로 가득 찬 TV는 우리를 울고 웃게 만드는 마술 같은 힘으로 없어서는 안 될 친구가 되어있다.

그런데 문제는 상업적 속성에 의해 만들어지고 보여 지는 TV 속의 세상이 알게 모르게 우리의 인식을 변화시키고 어떤 새로운 틀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준다는 점이다. 특히 드라마의 경우에는 일정부분 그 사회 대중인식을 반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현실감 있는 상황설정과 극적전개가 주는 재미로 별다른 비판 없이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우리 의식저변을 장악하는 드라마의 힘과 사회적 파급력은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최근 우리 곁에 있는 드라마들은 우리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이런 시각으로 국민드라마라 칭송받는 최근의 몇몇 드라마를 보면 한마디로 '유감'이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성숙한 시민의식의 퇴행이다. 특히 성 평등의식의 퇴행이라고 말하고 싶다. 예로 우리지역에서 촬영되어 더욱 화제가 되고 있는 '제빵왕 김탁구'만 보더라도 그렇다. 이 드라마에는 '돈 많은 회장님과 본처 그리고 내연의 처인 탁구엄마와 탁구'가 등장한다. 이러한 등장인물 구조는 드라마에 가장 단골로 등장하는 구조이다. '제빵왕 김탁구' 뿐 아니라 대부분의 드라마는 악행을 일삼는 본처와 착한 내연의 처 그리고 그 자식들이 겪게 되는 갈등과 고통, 음모와 암투, 복수가 주축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아이러니 하게도 고통 받고 상처받는 두 여자들의 전쟁 속에서 문제 상황의 원인 제공자였던 남자(돈 많은 회장님)는 갈등상황에 비켜서있을 뿐 아니라 두 여자 중 한 여자를 선택함으로서 승자를 결정하는 전지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어처구니가 없다.

축첩이 가능했던 조선시대도 아니고, 오히려 여성 상위를 걱정하는 오늘날 왜 우리의 드라마는 변하지 않을까? 그것은 아직도 우리사회의 성 평등의식이 제자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남존여비(男尊女卑)니 삼종지도(三從之道)니 하는 낡은 관념들은 우리 곁에서 사라진지 오래지만 그것들을 대체하고 우리사회를 더욱 민주적으로 성장시킬 새로운 의식은 아직 우리 곁에서 맴돌기만 할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사회면을 장식하는 성폭력 사건들이나 잊을 만하면 터져서 국민적 지탄의 대상이 되는 사회 지도계층의 성희롱 사건들은 모두 미숙한 우리사회의 성 평등 인식을 입증하는 결과물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토론회에서 대한민국은 여성정책의 천국이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양성평등 정책과 제도를 갖추고 있다고 한다. 다만 그 제도를 실천하고자하는 실질적인 평등의식이 이를 뒤따르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는 지적에 공감한다.

아쉽게도 여성정책 천국 대한민국의 인기드라마에는 주체적으로 스스로의 삶을 개척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여성이 없다. 남자를 통해 행복을 찾으려는 신데렐라를 꿈꾸는 여성들의 환타지 때문일까? 실제로 그런 여성 모델이 없어서일까? 우리는 언제쯤 여성, 남성을 떠나서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파트너로서 서로 존중받을 수 있을까? 여성의 한사람으로서 부끄럽기도하고 억울하기도 하다.

오늘은 무슨 드라마를 하는 날이더라?

스스로 인생을 책임지고 개척해나가는 진정 여자다운 여자들의 아름다움을 TV속에서 자주 만나 억울한 마음 없이 부끄러운 마음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드라마를 볼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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