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했던 시절의 행복

2010.10.20 18:29:53

유병택

증평향토문화연구회장

내 어린 시절은 가난과 수난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 가난했던 시절이 행복했던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웬일일까· 그것은 단순히 지난시절의 추억이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니다.

8.15해방과 6.25전쟁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우리는 우선 죽 한 그릇이라도 배불리 먹기만 하면 만족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그 양이 문제였지 질은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콩나물죽이거나 우거지죽, 아니면 고구마 밥이거나 무밥, 그 밖의 무엇이라도 좋았다. 삶은 고구마 한 개, 옥수수 한 자루라도 배만 부르면 그만이었다. 어떤 과일이나 껍질채 먹을 수 있었고, 목이 마르면 아무 우물물이나 퍼마셔도 좋았다. 흐르는 시냇물을 들이켜도 그만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어떤가· 한동안 영양가가 좋네, 나쁘네를 시끄럽게 따지는 가 했던니. 요즘에는 성인병에 안 좋다느니, 무공해 식품이 어떻다느니 하는 근심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과일 껍질이나 야채에 농약 성분이 남아 있다느니, 수돗물을 안심하고 마실 수 없다느니 하며 하루도 잠잠할 날이 없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의 마음이 편하거나 행복할 리 없다. 입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옷의 가짓수나 형식, 천의 질이나 종류는 묻지 않았다. 누덕누덕 기운 옷이라도 좋았다. 여름에는 여름대로 시원하게 입을 수 있는 삼베 잠방이 한두 벌이면 그만이었고, 겨울에는 겨울대로 춥지 않게 입을 수 있는 무명 옷 한두 벌이면 그것으로 흡족하였다.

광목옷이 없지 않았으나 그것은 거의 사치에 가까웠다. 순면 속옷 따위는 아예 없었고, 겨울에만 신는 양말은 기껏해야 두서너 켤레, 신발은 검정 고무신 한 켤레가 전부였다. 하루하루 무슨 옷을 입을 것인지, 무슨 신을 신을 것인지 전혀 걱정이 없었다. 얼마나 마음 편한 일이었겠는가· 입을 옷에 마음을 졸여야 할 일이 아무데도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철철 마다 옷의 종류도 많고, 그 질이나 형식 또한 가지가지로 많다. 와이셔츠는 그래도 여남은 벌이면 되는데, 넥타이만은 저절로 수십 개가 되기 일쑤여서, 오늘은 그 중 어느 것을 골라 써야 할지 망설일 때가 많다. 신발 또한 사정이 비슷하다. 사시사철 날씨나 출타 목적에 따라 적당한 신발을 골라야 한다.

이럴 때마다 나는 선택의 번거로움에 시달리면서 정신적, 시간적 낭비를 되풀이 한다. 그리고 보면 입을 옷에 대해서도 선택의 번거로움을 겪을 필요가 전혀 없었던 어린 시절의 가난이 지금보다 오히려 우리를 훨씬 행복하게 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분명히 잘 먹고 잘 입으며 지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정신적으로 더욱 행복해졌을 법한데, 사실은 그렇지 못한 듯하다. 1985년 1월 테레사 수녀(Mother Teresa)가 한국을 찾아 왔을 때 기자 한 사람이 물었다고 한다. 인도에는 가난해서 밥을 굶는 사람이 많지만, 한국에는 지금 가난할망정 밥을 굶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자선사업은 인도에서 더욱더 필요할 텐데, 한국에까지 그 사업을 하러 올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테레사 수녀는 대답했다. "인도에는 밥을 굶은 사람은 많지만 불행한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에는 배불리 먹으면서도 불행한 사람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그러한 사람들을 위하여 일 하려고 합니다."

가난이 꼭 불행으로 통하는 것은 아니며, 풍요가 반드시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님을 깨우쳐주는 한 마디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어렸을 때 가난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했던 것은 결국 지나친 욕심 없이 자기 처지를 받아들이는 순수한 마음의 자세로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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