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답사기 - 길, 그리고 햇빛 속에서

故 이윤기 선생을 추모하며

2010.11.07 20:16:46

2010년 8월 27일 우리 시대의 걸출한 신화학자이자 소설가, 번역가인 이윤기 선생이 타계하였다. 2002년 가을, 선생과 10여 일 동안 신화의 현장을 둘러보며 그의 학문과 문학적 열정, 특별했던 인품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안복을 잠시 누렸던 필자로서는, 너무도 빨리 스러진 그의 삶이 아연하고 허허로울 뿐이다. 선생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은 과천 그의 서재 툇마루에서였다. 작은 마루에 쏟아지는 햇살 한 줌을 가리키며 '이곳에서 잠시 햇빛을 받을 때 가장 행복'이라던 육성이 지금도 새롭다. 이제 이속을 떠난 신화의 세계 속에서 디오게네스처럼 한 줌의 빛으로 복록을 누리며 영면하시길…….

햇빛과 많은 소통을 이룬 피부였다. 그것은 그의 자유로운 영혼이 표피화된 것이기도 했다. 고대로부터 신화의 불을 지고 인천공항으로 걸어 들어온 이 프로메테우스적 사내(이윤기)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저 시원의 영성으로 신화의 불길을 지펴, 범국민적으로 제 삶의 자리를 추스르게 한 유명 인사로서는 별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옷차림이었다. 그러나 짧고 희끗한 머리와 그 청(靑)의 세계는 현실의 안위에 저항하는 듯, 그 자체로서 아름다운 힘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게다가 여행에 필요한 각종 소품을 장착한 검은 가죽 조끼까지 감안한다면 자신의 이상을 구현하기에는 가장 완벽한 복식이었다. 그 신화적 존재는 이 속(俗)의 공간에서 이방인처럼 도드라졌다. 그를 본 순간, 비로소 나는 떠나는 것을 실감하며 가슴이 뛰었다.

'저자와 함께 하는 그리스 로마 신화 답사 여행'을 갈 수 있으리라는 전화를 받은 것은 일몰 무렵, 저녁쌀을 씻고 있을 때였다. 끼니를 지으려 김치를 꺼내는 아줌마와 바다 거품 속에서 향처럼 피어난 아프로디테, 서로 교통되기 어려운 두 세계의 갑작스런 충돌에 일순 머리가 아연해졌다. 그 전화는 내게 단순한 입상 소식을 전한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영원으로 가라는, 믿기 어려운 통보였다. 그리고 그 영원으로 가는 길목을 가장 먼저 비추인 것은 그리스의 햇빛, 파르테논의 햇살이었다.

사진 속의 파르테논은 언제나 부신 햇살 속에 서 있었다.(비 오는 날의 신전은 상상되어지지도 않는다). 왜 하필 그 사진이었는지는 몰라도 아주 어릴 때부터 이국의 풍물 중 가장 흔하게 접하던 것이 바로 그 모습이었다. 그런데 나를 견딜 수 없게 하는 것은 신전이 아니라 언제나 그 햇빛이었다. 흰 기둥에 쏟아지는 햇살은 시리게 명료하고 투명해서, 사진 밖으로까지 빛의 촉수를 뻗쳐 나를 강렬하게 끌어당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종이에 박제된 햇빛은 내 손에 그저 매끄럽고 차가울 뿐이어서, 지구 저 편에서 쏟아져 내리고 있는 햇빛이, 내게는 그렇게 감각될 수 없는 불분명한 실체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때로는 의기소침해지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평소 사계의 순환을 햇빛의 농도와 양감으로 먼저 파악하는 나는 햇살에 꽤 집착하는 편이다. 어렸을 때 나무 그늘 하나 없이 폭양이 내리 쬐는 시골 학교 제방길을 늘 오가느라 골수까지 그 태양의 정령이 스며들어, 내 안의 오래된 빛이 저 밖의 신선한 빛을 감지하기 위해 발광(發光)하는 것인가. 내게 그리스 로마 여행은 바로 저 그리스의 신전 기둥에 기대서서 햇빛을 쪼이러 가는 것을 의미했다. 가늠키 어려운 세월 속에 서 있는 돌기둥에 현재의 실물감으로 붙어 서서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햇빛을 받다 오는 일이었다.

9월 25일,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프랑크푸르트에서 갈아탄 그리스 비행기가 밤의 아테네로 접근했을 때 지상의 도시는 별자리처럼 어른거리며 다가왔다. 이미 자정이 가까운 시각, 이 이방의 도시는 몽환적인 불빛으로 피어나 있었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호텔에서의 여행 첫날밤은 내게 뜻밖의 기쁨을 주었다. 장시간의 비행에도 쉬 잠들지 못하고 룸메이트가 된 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분이 바로 <마당을 나온 암탉>의 작가 황선미 선생님이란 것을 알았을 때의 놀라움이란! 위대한 혼의 어미 '잎싹'을 잉태하여 세상에 내보낸 작가가 잠옷 차림으로 다소 피곤에 지쳐 내 옆에 누워 있다는 것이 재미있고 즐거웠다.

이른 아침, 활기는 있으나 별 다른 감흥을 주지 못하는 아테네 시가지에 약간의 실망을 안고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으로 향했다. 사실 나는 박물관보다도 자연 속에 시간의 풍화를 겪으며 서 있는 신전이나 이제는 폐원이 되어 버린 옛 사람들의 삶터에 더욱 관심이 간다.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모든 작품이나 물품들을 원래 있던 삶의 자리에서 볼 수 있다면, 그 속에 품고 있는 존재의 기미를 더 잘 읽을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 때가 많다. 게다가 내게는 어떤 예술품에 대한 조형미나 회화미에 대한 안목이 결여되어 있어서 박물관에 어슷비슷 나열되어 있는 작품들을 보면, 이것을 대체 어찌 보아야 할지 당혹스런 기분조차 드는 것이다.

다만 나 같은 문외한에게도 때로는 벅찬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 있는데, 그럴 때도 내 머리 속은 온통 주변머리 없는 생각으로 꽉 차서 감상의 본질을 놓치고 마는 것이었다. 이것을 만들 때 이 사람은 아이들에게 시달리지는 않았을까(유탄처럼 튀어 돌아다니는 두 사내아이를 키운 엄마로서의 궁금증이다). 그때 바람은 좀 불었나. 쉬면서 무언가를 마셨다면 그것은 차였을까, 술이었을까.

본말이 전도된 이런 한심한 생각은 델포이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아테네 시가를 벗어나 점차 올리브 밭이 계속되고, 나무도 없이 암석만이 희뜩희뜩한 척박한 산들이 이어지자, 예전에 보았던 어떤 영상이 그곳에 자꾸 겹쳐져 아른거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민둥산마다 등성이 너머까지 마치 가르마처럼 하얀 길들이 여기저기 흐르고 있는 것이 보이자, 급기야 이란 감독 키아로스타미 영화 시리즈가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체리 향기>의 영화 배경은 이런 모습의 산들과 길로 사뭇 황막한 느낌이었다. 또 올리브 나무를 사이에 두고 냉담한 여인의 빠른 발걸음을 따라 잡으려 애쓰며, 그 올리브 잎새 사이로 언뜻언뜻 안타까이 스치는 사랑을 향하여 열렬히 구애하던 남자의 얼굴이 인상적인 <올리브 나무 사이로>……. 이곳이 이란과 접경지대도 아닌데 산세와 지형이 어찌 이렇게 닮을 수 있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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