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귀성객과 떡방앗간 모습이다. 당시는 귀향후 직장을 옮기는 것을 막기위해 전세버스로 귀성과 귀경을 도왔다.
개발독재가 성공을 거두면서 경제와 관련된 추석기사가 많이 생산됐다. 당시 제조업체들의 가장 큰 걱정은 구인난이었다.
값싼 노동력 덕택에 물건은 만드는 데로 해외로 팔려나갔지만, 속칭 '공돌이, 공순이'의 구인난이 찾아왔다. 특히 이들은 추석을 쇤 후 직장을 자주 옮겼다.
시골에서 친구에게 들은 얘기에 귀가 솔깃해졌기 때문이다. 1978년 9월 14일자 신문이 다음과 같은 제목을 뽑았다.
'공단마다 추석선심 만발'(큰 제목), '휴가·보너스 전에 없이 듬뿍', '버스 전세내 귀향 서비스', '돌아올 때 친구 데려오라 부탁도'(이상 작은 제목).
추석을 쇤 후의 후속기사도 이어졌다. 한 공단 관계자는 "귀사율이 95%에 이른 것은 노사협조가 잘 된 덕분"이라고 자화자찬했다.
'이처럼 수송작전의 성과가 효력을 보이자 최OO 공단관리 이사장은 예년 같으면 명절 뒤 종업원 귀사율이 낮아 보름 정도는 구인난 때문에 공장 가동을 제대로 못할 지경이엇다면서 노사협조는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는 것이 가장 쳡경이라고 한 마디'.-<1978년 10월 4일자>
구인난은 속칭 파출부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한 시간에 200-250원주고 2-3일 전에 예약을 해야 할 정도'로 시간제 주부가 인기를 끌었다. 이유는 경제성과 편리함 때문이었다.
'가정에서는 일을 몰아 부탁할 수 있고 매일 와있는 것보다 신경이 덜 쓰여 좋고, 가정부로서는 빨리 빨리 일을 해치우고 다음 집으로 가는 등 시간이 절략되어 좋다.'-<1978년 9월 7일자>
개발독재의 동의어는 '관(官)의 통제'로 볼 수 있다. 당시 박정희 정권는 추석 송편을 만드는 것에까지 꼬치꼬치 간섭했다. 전통 송편은 멥쌀가루로 만들어야 제맛이 난다.
그러나 당시 정권은 혼분식 장려차원에서 송편에 밀가루를 일정 비율로 넣을 것을 강권했다.
'추석을 앞두고 송편에도 밀가루 30%를 섞도록 계몽활동을 펴는 한편 오는 13일부터 19일까지 지도단속반을 편성, 떡방앗간 제병업소 등을 대상으로 순회 조사를 실시하기로 했다. 처벌 규정은 혼분식불이행업소 처별 규정에 따라 영업정지 등 행정조치를 취하기로 했다.'-<1975년 9월 8일자>
◇1980년대
물질 환경이 나아지면서 정부가 보다 여유로운 추석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1984년 4월 정부는 구정을 공휴일로 하지 않는 대신 추석을 이틀 연휴로 하는 방안을 처음으로 검토했다.
그러나 이 안이 정식으로 시행된 것은 그로부터 2년 후였다. 추석 연휴는 3년 후인 1989년 다시 사흘로 늘어났다. 극심한 교통체증이 주된 원인이었다. 1991년 9월 23일자 1면 제목이다.
'추석 대이동 가나 오나 짜증'(큰 제목), '귀성보다 붐빈 귀경 서울 새벽도착 많을듯', '승용차 이용 작년보다 26% 늘어'(이상 작은 제목)
◇1990년대
한국경제에는 거품이 숨어 있었다. IMF 이후의 90년대 추석에는 '우울한 추석', '차라리 추석이 없었으면' 등의 표현이 부쩍 많이 등장했다.
경제사정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상여금, 귀향비, 떡값 등이 축소되거나 사라졌고, 재고가 넘치면서 추석을 전후해 2-3주 억지 장기휴가를 보내는 경우도 생겨났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 또 다른 지면에는 '추석 연휴 여행지서 차례 지낸다'(1992년 9월 9일자) 기사가 등장했다. 부의 양극화 현상이 추석문화에도 극명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 조혁연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