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에게서 정직과 겸손을 배우자

2011.09.14 17:55:35

김승환

충북대교수 / 충북문화예술연구소장

1980년대 중후반, 필자는 역사문제연구소에 다녔다. 청년 연구자들의 패기가 충천했지만 아직 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이다. 서대문의 충정로 언덕 위에 있던 이 연구소는 역사와 문학을 중심으로 하는 신생연구소였다. 당시 역사문제연구소는 역사의 이이화 선생과 문학의 임헌영 선생이 중심이 되어 학문을 통한 진보의 담론을 생산하던 곳 중의 하나였다. 청년 연구자들이 사숙(私塾)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연구소에 나갔던 것은 관학(官學)이 가르치지 못하는 것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원래 대학(大學)은 검증된 이론을 지지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고, 그 보수의 전통을 지키면서 자유와 진보를 실험하는 곳이므로 당시 대학의 보수적 풍토를 비난할 수만은 없다. 다만 곡학아세(曲學阿世)하면서 어용교수로 학자의 양심을 저버린 분들과 진보에 대한 비이성적 적대감을 보인 분들이 있었다는 것이 아쉽다. 그렇다고 진보적 청년 연구자들과 관학파 교수들간에 갈등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선배 교수들은 청년 연구자들에게 진보적 학문을 권하기도 했다.

학습과 연구를 마치면 밤 10시가 되는데 그때까지 서로 저녁을 먹었는가를 묻지도 못했다. 1988년 가을로 기억되는 어느날, 문학팀 십여 명이 어슬렁 불빛을 타고 가다가 설렁탕집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그곳에는 역사팀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미 좌중은 이이화 선생의 도도한 장광설을 따라 식민사관(植民史觀)을 해체시키는 판이었다. 그 곁에 책상물림같이 조용한 그가 있었다. 허름한 차림의 그는 박원순, 검사 출신의 변호사였고 역사문제연구소의 운영자금을 마련해 주던 사람이었다. 그는 운동권 출신답게 언제나 검소했고 항상 겸손했다. 그리고 정직했다. 변호사로 상당한 재부를 축적할 수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돈을 연구소나 여러 곳에 희사했기 때문에 변호사치고는 무척 검소하게 살았다. 그후 필자는 그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늘 눈이 갔고, 또 마주칠 때나 먼발치에서 볼 때면 그의 검소와 겸손을 떠올렸다.

그런 그가 서울시장에 출마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사실 필자에게는 의외였다. 시민운동이나 민중운동으로 사회를 선도할 수 있고 그것이 더 큰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특히 박원순은 성격상 정치에 맞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와 동시에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으니 의사 출신 과학자인 안철수 교수가 서울시장에 출마한다는 풍문이었다. 역시 안철수도 정치에 부적합할 뿐 아니라 정치보다 전문 영역에서 한국과 세계에 기여할 수 있다고 믿기에 이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의 문제를 가지고 많은 분들이 여러 가지로 예단(豫斷)했지만 필자에게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안철수의 성격과 박원순의 인격을 조합해 보면 당연히 안철수가 양보하리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박원순과 안철수 두 사람을 조금이라도 아는 분이라면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실제로 지난 9월 6일, 안철수는 박원순을 추천하면서 자신의 출마설을 잠재웠다. 어떻게 이런 극적인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은 고도의 계산적인 머리나 복잡한 정치역학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기본의 문제이고 지극히 단순한 본질의 현현이다. 정직하고 겸손한 안철수는 역시 정직하고 겸손한 박원순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번 일로 정치가들은 반드시 충격을 받아야 한다. 정치는 타협과 양보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때로는 유연한 자세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정직을 바탕으로 해야 가치가 있는 것이지 아무때나 타협하고 양보하는 것은 야합(野合)에 불과하다. 안철수가 대권에 도전한다거나 박원순이 서울시장 후보가 되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정직, 공정, 자유, 평등의 가치가 한국사회에 통용되는가'라는 고전적 물음이다. 늦었지만 한국사회는 정직하면서 열려 있고 겸손하면서 당당한 가치를 확립해야 한다. 안철수가 한국사회를 강타한 것은 바로 정직과 겸손이다. 안철수가 보여준 정직과 겸손이 통하는 사회, 이것은 대한민국이 비로소 부르주아 시민사회 즉 국민국가(Nation State)에 도달했다는 확실한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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