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순력을 일기로 쓰다, 관찰사 이제

2012.03.29 16:18:52

조혁연 대기자

순력(巡歷)은 조선시대 관찰사가 도내의 각 고을을 순찰하던 제도를 말한다. 달리 순행이라고도 불렀다. 관찰사의 순력은 왕명을 대신 실행하는 것과 고을의 풍속과 민생을 살피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물론 수령이 행정을 잘 펼치는가 여부를 살피는 것도 주요 임무의 하나였다.

관찰사의 순력 행차는 위용이 대단했다. 행차는 장교·군관·나장·도사·찰방·심약·검률·반당·노자(奴子) 등 많게는 수백인이 수행했다.

다소 어려운 단어들이 많이 등장했다. 나장은 죄인을 다루는 하급직, 심약은 약재 검수관, 율령직, 반당은 호위병 등을 일컫고 있다. 이쯤되면 지금으로 치면 도청직원 전체가 움직이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따라서 관찰사 행차가 있을 경우 각 고을 연도에는 구경꾼들로 북적였다.

관찰사는 감사마교(監司馬轎)라고 불리는 말수레를 타고 움직였고,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둑(纛·대형기의 일종), 취라치(吹螺赤)·나팔·대평소 부대를 앞세웠다. 이밖에 사모갑(紗帽匣)·인장, 유서(諭書)·절월(節鉞) 등을 휴대하고 떠났다.

사모갑은 모자, 유서는 임금이 내린 명령서, 절월은 말 그대로 절(節)과 월(鉞)을 일컫는다. '절'은 손에 드는 작은 수기(手旗) 모양으로 관찰사 권위를 상징했다. '월'은 긴 자루가 달린 나무 도끼로 은빛 또는 금빛을 칠한 것으로 징벌권을 의미했다.

조선시대 효종-숙종 연간에 충청도관찰사를 지낸 인물로 이제(李濟·1654∼1714)가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박세당(朴世堂)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고, 1687년(숙종 13)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이후 시직(侍直·세자 수행원) 등 여러 관직을 거쳐 1704년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됐다.

그가 쓴 일기인 '충청감영일기'가 현존한다. 그는 충청도관찰사로서 비교적 짧은 재임 기간 중인 1704년 8월 28일부터 9월 25일까지 28일간 1차 순력, 10월 4일부터 24일까지 2차 순력을 했다.

1차 순력 때는 충청좌도(지금의 충북) 지역을 순회하게 된다. 충청감영이 있던 공주를 나온 그는 회덕-문의-옥천-영동-황간-청산-괴산-연풍-충주-제천-영춘-단양-청풍-음성-청안-청주-연기를 거쳐 다시 공주로 돌아갔다.

열흘 뒤 그는 공주감영을 나와 이번에는 충청우도(지금의 충남) 지역은 순력했다. 루트를 살펴보면 청양-임천-한산-비인-해미-태아-서산-홍천-예산-온양-천안-목천을 거쳐 공주로 돌아갔다.

조선전기 관찰사는 이같은 순력을 대략 일년에 두번 정도 가졌다. 그러나 관찰사의 순력은 워낙 많은 인력이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폐단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후기 들어서면 순력 횟수가 감소하기도 했다. 정약용이 그의 저서 목민심서에서 이를 강하게 비판했다.

'군현의 아전수를 줄이지 못하고, 계방(契房)을 혁파하지 못하고, 전부(田賦)를 감소시키지 못하고, 연호잡역(煙戶雜役)을 줄이지 못하는 등 모든 폐단이 감사의 순력에서 나온다'.

계방은 조선 후기 각 지역 백성들이 하급관리와 결탁, 돈을 내고 군역·잡역 등을 경감받거나 불법을 묵인받던 행위를 말한다.전부는 전답에 대한 조세, 연호잡역은 민간인에게 부과하던 부역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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