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패법을 건의하다, 충청감사 황자후

2012.04.05 18:18:03

조혁연 대기자

호패(號牌)는 조선시대 16세 이상 남성이면 누구나 차고 다녀야 할 물건이었다. 이 호패제도는 호구(戶口) 파악, 유민(流民) 방지, 각종 국역(國役)의 안정적인 조달 등을 위해 도입됐다.

호패에는 착용자의 신분, 지위, 거주지 등 기본적인 인적 사항을 명문으로 새겼다. 따라서 오늘날로 치면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주민등록증과 비슷한 일면을 지녔다.

호패는 2품 이상과 삼사(三司)의 관원인 경우에만 관청에서 제작한 것을 지급받았다. 나머지 대부분의 경우는 백성 각자가 성명, 출생신분, 직역, 거주지 등을 패에 새긴 후 관청에 제출하면 관청이 이의 사실 여부를 확인한 후 낙인을 찍어 발급하는 형식을 취했다.

현재 문신 김희(金憙, 1729∼1800)의 호패가 중앙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그의 호패 앞면에는 '김희(金憙) 기유생(己酉生) 계사문과(癸巳文科)'라고, 뒷면에 '갑진(甲辰)'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를 통해 김희라는 인물은 기유년(영조 5, 1729)에 태어나 계사년(영조 49, 1773, 당년 45세)에 문과에 급제했으며, 갑진년(甲辰年, 정조 8, 1784)에 이 호패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호패법은 조선 전기인 태종 때 처음 도입됐다. 이의 실행을 건의한 인물이 황자후(黃子厚·1363∼1440)다. 그는 서두에 언급한 내용중 특히 유민방지 필요성을 강조, 호패법 실시가 절실하다고 상언했다. 상언은 글 즉 문서 형식으로 상소를 하는 것을 말한다.

'전 인녕부사윤 황자후가 호패의 법을 행하도록 청하였다. 상언하기를, "국가에서 비록 재인(才人)이나 화척(禾尺)의 무리들로 하여금 유이(流移)하지 못하도록 하더라도 호패가 있지 않은 까닭으로 이사하는 것이 무상하고 농업을 일삼지 않습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비단 이러한 무리뿐만 아니라, 또 모든 백성들에게 모두 호패를 지급하소서." 하니…'-<태종실록>

황자후의 이같은 상언에 대해 태종은 "이 앞서 호패를 말하는 자가 또한 많았다. 나 또한 항상 이를 행하고자 하였다. 그 시산(時散) 양부(兩府)와 각사로 하여금 그 가부를 의논하여 아뢰어라"라고 답변한다. 이는 호패법 건의가 황자후가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호패법 실시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황자후의 건의였다.

오랫동안 논란이 있었던 호패법은 황자후가 건의를 한 바로 이날 최종적인 결론이 났다. 태종실록은 이 부분에 대해 "(호패법) 이제 시행하고자 하여 백사(百司)로 하여금 가부를 의논하게 하니, 가(可)하다고 하는 자가 많이 있다"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예, 예"하였다"라고 썼다.

황자후는 지금의 대전광역시 회덕 사람이다. 그러나 황자후는 전회에도 언급했듯이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는 등 우리고장과 깊은 인연을 맺었던 인물이다. 이때의 충청감영은 충주나 청주목에 위치했었다. 그가 졸하자 세종은 이례적으로 조문을 내려 깊은 애도의 뜻을 표했다.

"경은 품성이 온량하고 조행(操行)이 충직하였도다. 이름이 사판(仕版)에 올라 빛난 직질(職秩)을 두루 지냈도다. 다섯 번 고을을 맡았는데 백성이 한 해만 더 있어 주기를 원하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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