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들어 하늘에게 묻다, 제천 권섭

2012.04.12 16:09:43

조혁연 대기자

조선시대 선비들은 정주개념 외에 별장문화 의식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석간수 흐르는 계곡에 아홉구비를 뜻하는 구곡(九曲)을 설정하고 각 구비마다 시를 지었다.

주자가 설정한 중국 복건성 무이산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이 그 기원으로, 이 영향을 받아 퇴계 이황은 도산십이곡, 율곡 이이는 고산구곡가를 지었다. 구곡시는 우리고장 괴산에 유난히 많이 남아 있다.

이런 구곡은 좁은 수계가 아닌, 넓은 곳에 설정되기도 한다. 제천~청풍 일대에도 구곡시가 존재하고 있다. 저자는 조선 영조 때 제천 인물인 권섭(權燮·1671∼1759)은 황강구곡가(黃江九曲歌)를 지었다.

그는 1곡부터 9곡까지 지역 순에 따라 각각 한 곡마다 시조 1수씩을 지었다. 각 곡명은 1곡 대암(對岩), 2곡 화암(花岩), 3곡 황강, 4곡 황공탄(皇恐灘), 5곡 권호(權湖), 6곡 금병(錦屛), 7곡 부용벽, 8곡 능강(綾江), 9곡 구담 등이다. 이중 황공탄은 전회에 소개한 바 있다.

지면상 제 8곡가인 능강만을 소개하면 '八曲이 어드메오 綾江洞이 맑고 깊어 / 琴書 사십년의 네어인 손이러니 / 아마도 一室雙亭의 못내들겨 하노라'라고 썼다.

혹자는 8곡에 대해 시각과 청각의 회상적 결합에 있다. 천길 절벽과 학의 울음이 만들어내는 절창이다. 문풍과 예악이 숨쉬는 청풍체 음악의 전통이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권섭은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때는 19세로 소두(疏頭)가 되어 상소를 올리는 등 한때 시사에 관심을 가지기도 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권섭은 열혈 청년이었다. 소두는 상소를 할 때 가장 맨앞에 서는 주모자를 일컫는다.

'사학의 유생 권섭(權燮) 등이 상소하여, 정시한(丁時翰)을 논하여 배척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정시한이 양현(兩賢)의 복향(復享)을 사문(斯文)의 불행이라고 말하고, 송시열에 대하여는 집요하고 바르지 않다고 배척하였으니, (…) 한 사람도 분명하게 가려서 힘껏 배척하는 정신(廷臣)이 없는 것이 한스럽습니다.'-<숙종실록>

그의 아우는 대사간 권형(權螢), 큰아버지는 대유 권상하(權尙夏), 작은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낸 권상유(權尙遊)이다. 이중 권상하는 스승 우암이 예송논쟁 때 유배당하는 것을 보고 청풍으로 낙향,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그는 한벽루 일대의 가을 풍광을 '한 피리 소리 들리는 빈 강의 밤 / 千山에 낙엽지는 가을이라 / 외로운 배 어디서 온 나그네 / 흰 마름 모래톱에서 밧줄을 매네'라고 읊었다.

권섭도 비슷한 이유로 큰 아버지가 있는 청풍을 찾는다. 경종은 소론의 세를 등에 업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자 소론은 노론을 집중 공격했고,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바로 임인옥사다. 이때의 그의 장남 진성(盡性)도 희생됐다.

그는 이때의 심정을 "어린 손자를 데리고 가다 머리를 들고 하늘에게 물었으나 하늘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携持兒孫 昻首問天而天不應矣)라고 적었다.

그는 두번 다시 관가에 나가지 않고 전국을 유람하며 시작에 몰두, 많은 양의 한시, 시조, 가사 등을 쓰게 된다. 황강구곡가도 그 연장선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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