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이성계 족보와 괴산 김정경

2012.04.24 18:29:32

조혁연 대기자

명나라는 조선건국 초기부터 무려 선조 임금대까지 정확하지 않은 이성계의 족보를 기록했다. 당연히 조선은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이의 수정을 요구했다. 양국을 오랫동안 불편하게 했던 종계변무(宗系辨誣) 사건이다.

사건의 발단은 고려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1390년(공양왕 2) 이성계의 정적이던 윤이(尹彛)·이초(李初)가 명나라로 도망쳤다. 이때 둘은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이라고 고해받쳤다.

그 뒤 명나라는 이들의 말을 믿고, 자국의 태조실록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그대로 기록했다. 조선 조정이 이성계의 족보가 명나라 사료에 잘못 기록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394년(태조 3) 4월이었다.

당시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 지금 식으로 표현하면 어업권 분쟁이 있었다. 이때 명나라가 항의한 문서에 '高麗陪臣李仁任之嗣成桂今名旦者云云'(고려배신 이인임지사성계 금명단자운운)라는 내용이 서술돼 있었다. 풀이하면 '고려의 신하 이인임의 후손인 성계의 지금의 이름을 단이라 하는 등' 정도가 된다.

명나라에 있어 이성계 족보는 관심 사항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건국 직후의 조선으로서는 왕통의 합법성이나 왕권 확립에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더구나 이인임은 우왕 때의 권신으로 이성계의 정적이었다.

그런데 이성계가 그의 후사라고 표현한 것은 가장 모욕적인 말로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사항이었다. 조선 조정은 1394년 6월 명나라 사신 황영기(黃永奇)가 자국으로 돌아갈 때 "태조 이성계 족보가 잘못 기록돼 있으나 꼭 고쳐달라"고 신신 당부했다.

그러나 명나라를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1402년이 되자 이른바 고명(誥命)과 인신(印信)의 문제가 해결되는 등 양국 관계가 어느 정도 호전됐다.

고명은 중국이 이웃나라 왕의 즉위를 승인하는 것, 인신은 왕의 권위를 보장해주는 도장을 일컫는다.

그러나 이성계 족보 문제는 여전히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조선 조정은 다시 사신을 명나라에 파견, 종계변무 사건의 해결을 시도했다. 이때 사은사 이빈(李彬), 민무휼(閔無恤)과 하정사 김정경(金定卿)이 사신사로 각각 파견됐다.

사은사는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될 때 임시로 파견하는 사절, 하정사는 정월 초하루에 중국 황제에게 신년 하례를 위해 파견되는 정기 사절을 말한다. 그러나 이들도 결국은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실록에 관련 내용이 보인다.

'본부상서 이지강(李至剛) 등이 성지(聖旨)를 흠봉(欽奉)하였는데, '조선 국왕이 아뢰기를, '이인임의 후손이 아니라'고 하였으니, 생각건대 그 전의 전설(傳說)이 틀린 것이다. 그의 말에 준하여 개정(改正)하라'하였으므로, 그대로 흠록(欽錄)하였다.'-<태종실록>

인용문 중 흠록은 '받들어 기록했다'는 외교적 수사로, 명나라가 여전히 적극성을 보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하정사로 명나라에 파견됐던 김정경(金定卿·1345∼1419)은 우리고장 괴산 인물이다.

그의 위패를 모신 위정사(威靖祠·도문화재자료 제 12호)가 장연면 광진리에 위치하고 있다. 사당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으로, 일각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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