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문둥병과 존속살인, 청주 박귀금

2012.05.13 18:07:56

조혁연 대기자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 낯선 친구 만나면 /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 천안 삼거리 지나도 / 쑤새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발꼬락이 또 한개 없다. //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꼬락이 잘릴 때까지 /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길.'

문둥병 시인 한하운(韓何雲·1920~1975)이 1949년 '신천지'에 발표한 '전라도길-소록도 가는 길에'라는 시의 일부다. 소록도로 가는 길이 마치 광야의 고행처럼 묘사돼 있다. 다음 시 '벌'은 일반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한하운의 또 다른 시다.

'죄명(罪名)은 문둥이... / 이건 참 어처구니 없는 벌이올시다. // 아무 법문(法文)의 어느 조항(條項)에도 없는 / 내 죄를 변호할 갈이 없다…'

시 '소록도 가는 길'에서는 '붉은 황토길'과 '쑤새미 같은 해'가 공간과 시각적으로 강렬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반면 시 '벌'은 '내 죄를 변호할 갈이 없다'는 표현에서 보듯 천부인권적인 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문둥병의 본래 이름은 발견자 한센(G.A. Hansen)의 이름을 딴 '한센씨병'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한센씨병을 '나병'(癩病) 또는 '나질'(癩疾)이라고 불렀다. 실록에 당시 사람들이 이 나질을 얼마나 무서워했지 잘 나타나 있다. 격리시킨 후 저절로 죽기를 바랬다.

'제주가 바다 가운데에 있으므로 사람들이 나질이 많았는데, 비록 부모 처자일지라도, 또한 서로 전염될 것을 염려하여 사람 없는 땅으로 옮겨 두어서 절로 죽기를 기다렸다.'-<문종실록>

일반화되지는 않았지만 조선시대에는 문둥병을 '대풍창'(大風瘡)이라고도 불렀다. 이때의 '창'은 부스럼을 뜻한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은 문둥병을 부스럼이 깊어져 손마디가 떨어져 나가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실록에는 '대풍창'과 관련된 내용이 딱 두번 나온다. 그중 한 번이 우리고장 청주목에서 발생했다. 1638년(인조 16) 박귀금이라는 인물은 부친이 대풍창에 걸리자 초막에 인위적으로 격리시킨 후 불을 질렀다.

'청주(淸州) 사람 박귀금(朴貴金)이 자기 아비가 일찍이 대풍창(大風瘡)을 앓자, 전염될까 염려하여 산에다 초막을 지어 놓고 아비를 그곳에 내다 두었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모의하여 초막의 문에다 풀을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감사가 그 사실을 조정에 아뢰자…'-<인조실록>

조선시대에는 모반죄와 함께 윤리에 관한 죄, 즉 강상죄를 가장 엄하게 다스렸다. 문둥병의 전염을 걱정했다고는 하지만, 초막에 가두는 것도 모자라 불을 내 죽인 것은 강상죄 중에도 상 강상죄에 속했다.

피의자 박귀금은 국사범으로 다뤄졌다. 따라서 박귀금은 청주목이 아닌 중앙 의금부로 끌려가 '삼성추국'을 당해야 했다. 삼성추국은 임금의 특별 지시에 따라 의정부, 사헌부, 의금부 등 세 관원이 함께 추국하는 것을 말한다.

박귀금은 생각보다 형량이 적은 장일백(杖一百)에 처해졌다. 이는 사건발생 3개월 후에 보고됐고, 또 상대방에 의한 일부 무고성도 있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미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말이 완전히 드러난 사건은 아니었다. 다만 대풍창의 공포가 여과없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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