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로당'왕언니' 오늘도 행복하실까

2012.06.06 15:43:13

오병미

충청북도청주교육지원청 장학사

나에게는 연세가 90이 다 되어가는 친정어머님이 계시다. 무엇이든지 적극적이고 흥이 많아 놀기를 좋아해서 아버님에게 꾸중도 많이 들었다. 한창 바쁜 농사철에도 놀러 갈 기회만 생기면 아버지에게 핑계를 대고 갔다 오신다. 나중에 들통이 나 혼이 난 적을 보았다. 아버님에게 혼이 나시고도 놀러갔다 오시면 기분이 좋아 보이셨다.

어머님은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셨는데 가난한 아버지에게 시집을 와 고생을 한다며 늘 푸념을 늘어놓곤 하셨다. 워낙 꼼꼼하신 아버님은 빈틈이 없으셨는데 어머님은 낙천적이라 무엇을 하든 고민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 어머님이 불리할 때가 많았다. 그런 어머님은 지금 아들집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고 계신다.

직장 생활하는 막내딸이 안쓰러워 외손자, 외손녀를 손수 길러주셨다. 그렇게 길러준 우리 아이들을 지금도 끔찍하게 생각하신다. 친손자, 친손녀 이름까지 우리 아이들 이름으로 바꾸어 부를 정도로 우리 아이들에 대한 애착심이 강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올케가 외손자, 외손녀만 예뻐한다고 서운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놀러가기 좋아하고 활동력이 왕성한 어머님이 몇 년 전부터 부척 나이가 들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며 보청기를 해 달라고 하지를 않나, 온몸이 안 아픈데가 없고 기운이 없다고 보약, 영양주사 등 요구하는 사항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행동은 어린 아이처럼 삐지시기도 잘 하신다. 방금 하셨던 말씀도 안했다고 '뚝'잡아떼곤 해 며느리가 모시기 힘들다는 소리를 한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보청기가 해 달라고 해서 해 드렸다. 보청기도 외제가 좋다며 상표까지 주문하시는 적극성을 보이시던 어머님은 불편하다며 금방 빼 버리셨다. 그럴 때마다 우리 남매들은 어머님의 대단성에 한바탕 웃곤 한다. 요즈음은 경로당 생활에 푹 빠져 하루생활을 주로 그곳에서 하신다. 경로당에서 친정어머님을'왕언니'라고 부른다. 경로당에서 최고 존칭어인 것 같다. 자식 자랑이 유난히 심하신 어머님은 막내딸인 나를 자주 경로당에서 자랑하곤 하신다. 그래서 내가 찾아가면 신이 더 나신다. 어머님은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하시고 욕심이 많은 분이시다. 그래서 경로당에서도 자식이 주는 용돈으로 소위 말하는'위세'를 세우려고,'왕언니'이미지 관리를 하시려고 자주 음식을 사시곤 하신다. 그러면 경로당에 계시는 어르신들이'왕언니'가 최고라고 추켜세워 주신다. 또한 매월 15일이 경로당 회의 날인데 며느리와 막내사위가 번갈아 가며 음식을 제공한다. 우리 집 달력에는 매월 15일은 '빨간글씨'로 동그라미 쳐있다. 한번은 경로당 회의 날을 못 챙긴 적이 있었다. 바로 그날 전화가 왔다. 갈 사람이 없어 아는 사람을 수배하여 음식을 전달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요즈음은 매월 14일이면 어김없이 전화가 온다. 내일이'경로당 회의'라고.......

'얼마 못 살 것 같다'는 이 세상에 삼대 거짓말 중에 하나를 우리 어머님도 자주 하신다. 처음에는 외손자 대학교 가는 것만 보고 죽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지금 소원은 외손녀 결혼하는 것을 보고 죽는 것이란다. 이번 어버이날에 가족끼리 모여 어머님과 가까운 유원지를 갔는데 그곳에서 하시는 말씀 "내가 죽으면 묘에 좋은 둘레석과 비석을 해 달라고 하신다"그래서 또 한바탕 웃었다.

죽음을 생각하시면서도 그놈의'위세'를 세우려고 하시는 어머님, 얼마 못 살 것 같다는 거짓말을 자주 하시더라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매일 퇴근길에 전화로라도 어머님 목소리를 들으면 하루가 편안해진다. 경로당'왕언니'오늘도 행복하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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