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서(聽書)

2014.07.21 17:41:18

윤기윤

前 산소마을 편집장

1958년 독일. 고열 증상이 심한 15세 소년이 공동주택 입구에서 구토를 하고 있다. 이때 30대 중반의 한 여인이 다가와 돌봐주고 귀가하도록 부축해준다. 심하게 앓고 난 10대 소년 마이클 버그는 완치 후, 꽃다발을 들고 여인을 찾아온다. 소년과 전차 검표원으로 홀로 살아가는 여인 한나 슈미츠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된다. 한나에게 마이클은 책으로 다가왔다. 풋풋한 소년이 가만히 읊조리는 책의 내용에서 한나는 평화로운 위안을 얻는다. 그녀는 만날 때마다, 소년에게 항상 책을 읽어달라고 했다. 글을 모르는 그녀는 마이클의 낭독을 통해 문학소녀가 되고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에 눈물 흘린다. 책읽기 경청은 한나에게 삶의 기쁨이 되어갔다. 영화 '책 읽어주는 남자'의 내용이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내가 읽어드리는 소설책을 즐겨 들으셨다. 특히 '삼국지'를 좋아하셨는데 제갈공명이 오나라와 연합해 조조를 물리치는 적벽대전을 반복해 들으셨다. 짚으로 새끼를 꼬면서도 곰방대를 물고 창밖을 바라다보면서 귀를 쫑긋 세우고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통해 이야기 속에 빠져드셨다. 책을 제법 읽는다는 소문이 돌자, 동네 어른까지 몰려와 대청마루를 가득 메우기도 했다. 그 당시 이야기책만큼이나 사랑을 독차지한 매체는 라디오였다. 라디오는 또 다른 '책 듣기'의 연장이었다. 제 몸보다 훨씬 큰 배터리를 칭칭 감은 작은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은 흔하디흔한 풍경이었다. 그것은 노동에 지친 농부들에게 꿀처럼 달콤한 휴식의 방법이었다.

이후, 그런 풍경들은 TV의 등장으로 점차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영상매체인 TV는 상상할 틈을 주지 않는다. 귀로 들리는 라디오는 온갖 상상의 여유를 준다. 상상을 위해서는 최대한 몸을 이완시키고 눈을 감는 것이 좋다. TV는 눈을 떠야 보이지만, 라디오는 눈을 감아도 들린다. 눈을 감는 행위는 어쩌면 휴식이지 않는가.

눈보다 귀를 활용한 독서를 하나의 문화로 자리매김한 곳이 독일이다. 소위 청서(廳書)라는 독서형태가 오래전부터 문화로 뿌리를 내렸다. 독일인의 책 듣기 문화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아이가 잠들기 전까지 침대 옆에 앉아 책을 읽어주는 것은 독일 부모에겐 일종의 의무이다. 아이는 부모가 읽어주는 내용을 들으며 스스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 이야기 세계 속으로 빠져들다가 곧 잠의 품에 안긴다. 이처럼 책을 읽어주고 듣는 문화는 무한한 상상의 세상과 평온함을 동시에 준다.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면서 미래의 꿈은 건강하게 다져지는 것이다.

강렬하고 자극적인 음성적·시각적 이미지가 난무하는 디지털 미디어 사회에서 고요한 가운데 차분한 음성으로 전해지는 책내용을 들으며 문학과 평온의 세계에 빠져드는 것도 좋은 힐링이 될 것이다.

"올 여름 휴가를 끝내고 집으로 올라오는 열차 안에서 책을 한 권 '들었습니다.'"

이제 흔들리는 열차에서도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눈을 감고 책을 듣는 풍경도 좋을 것이다. 출퇴근 시간 길에 책을 읽고 싶은 사람,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사람. 점심시간에 남는 시간을 애매하게 보내기 싫은 회사원, 걸어서 출근하는 사람. 등교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학생들. 흔들리는 버스에서 눈이 나빠질까 겁나는 사람들에게 획기적인 방법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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