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살맛나는 세상

2014.07.22 13:35:42

방광호

청석고등학교 교사

"빽~꼬을~!"

목청을 쥐어짜는 듯한 소리가 7월 한낮의 무더위를 주춤 물러서게 하며 들판에 메아리쳤다.

"……?"

지프차를 타고 예하 중대 순찰에 나섰던 백골부대 대대장과 부관이 동시에 소리의 진원지 쪽으로 시선을 모았다.

"김 중위, 방금 무슨 소리였나? 한 번 확인해 보게!"

대답과 동시에 1호차에서 부관이 뛰어내렸다. 연한 분홍빛 수염이 검붉게 말리기 시작한 옥수숫대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드문드문 서 있는 길가 참외밭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조금 더 들어간 움푹한 곳에 한 병사가 버짐 퍼진 얼굴인 양 하얗게 소금기가 앉은 모습으로 엉거주춤 바지를 끌어 올리고 있었다. 잔뜩 긴장한 표정의 병사가 입고 있는, 하얗게 빛바랜 군복은 노동자의 차림새와 진배없었다.

"야, 너 거기서 뭐하고 있나?"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부관이 물었고, 그 병사는 작업을 하다가 마을로 식수를 길러 왔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속이 좋지 않아 일을 보던 중이었단 말도 보탰다.

"헌데 왜 하필 남의 참외밭이냐, 너 일 보는 데가…?"

"마을까지 가야 했는데 너무 급해서 그만…"

"바른 대로 말해. 참외 서리 온 거 아니야?"

"아닙니닷!"

"차아식, 알았어 임마. 대대장님껜 적당히 보고드릴 테니까 얼른 작업장으로 돌아갓! 알았나?"

"넵, 고맙습니다. 백골!"

"참, 소속이 어디야? 몇 중대 몇 소대 누구냐?"

대대장 명령을 받아 적느라 늘 끼고 다니는 수첩에 소속과 이름을 기록한 부관은 얼굴이 시커멓게 탄 사병이 땡볕 아래서 땀방울까지 뚝뚝 흘리는 모습이 안 돼 보여선지 더 이상의 추궁 없이 그렇게 1호차로 돌아갔다.

급한 볼 일을 치르다가 갑자기 1호차가 눈에 들어왔다. 제 발 저린 도둑이 엉겁결에 경례를 들판이 떠나가도록 해 버렸다. 하지 않아도 될 인사를 했다고 후회하며, 틀림없이 영창행일 거라고 겁에 질려 있던 병사는 인정 있는 장교를 만나 안도의 한숨을 길게 뽑아냈다.

사실은 소대원들이 인근 산 능선에서 산병호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잠깐 쉴 참에 입이 심심했던 고참병들이 담배를 피워 물고는, 단내를 풍기며 익어가고 있을 저 아랫마을 참외밭을 가리키며,

"고거나 한 개씩 깨물어 먹으면 차암 좋~겄다!"

하고 변죽을 울렸다. 그러잖아도 작업이 싫증나던 차에, 말귀 잘 알아듣고 발 빠른 전 일병이 덩치 큰 동기 한 명과 특공조로 나섰다. 위장망을 두르듯 자루와 물통을 짊어지고 산비탈을 내려와 참외밭으로 들어갔는데, 노오랗게 익어가는 참외들이 깜찍한 얼굴들을 저마다 내밀고는, '여기요! 저기요!' 하며 소리를 질러대자 민망하게도 뱃속에선 속부터 비우라고 생난리였던가 보았다.

그 날 일과 후, 중대장 실에서 전 일병을 호출했다. 사람 좋은 중대장은 모든 걸 다 알지만 기꺼이 명령에 따르겠다는 듯 머리를 뒤로 꺾으며 호쾌하게 웃어댔다.

"전 일병, 너 또 무슨 일을 벌이다가 대대장님을 감동먹였냐· 똥 누다가 귀청이 떨어지게 인사하는, 군인정신으로 똘똘 뭉친 녀석은 네 놈이 처음이란다. 어쨌든 축하한다, 일주일간 포상휴가가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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