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평 '죽이리'가 '원평마을'로 바뀐 사연

2014.08.26 16:48:14

조혁연 대기자

증평군 증평읍 '죽리'는 행정구역상 '죽1리'와 '죽2리'로 나뉘어져 있었다. 지금은 '죽1리는 '죽리', 죽2리는 '원평마을'로 부르고 있으나 법정지명은 여전히 '죽리'이다. 이곳 지명이 '대竹' 자의 '죽리'가 된 사연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는 1914년 일대를 대나무가 많은 동네라는 뜻으로, 죽리(竹里)로 작명했다. 이후 인구수가 늘면서 법정명은 '죽리' 그대로 유지됐으나 행정명은 '죽1리'와 '죽2리'로 분화됐다. '죽2리'. 문자로 표기하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소리로 호칭하면 다소 심각한 현상이 발생한다. 문법상 '죽이다'에서 파생한 '죽이리'에는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의지(will)가 들어가 있다. 따라서 "어디 살으세요"라고 물었을 때 "죽이리 삽니다"라고 답을 하면, 상대방은 난감해 할 것이 분명하다.

지난 2006년 죽리(竹里) 주민 중 죽2리 마을대표 임태정 씨가 증평군청을 방문해 "죽1리와 죽2리를 한자로 쓸 때는 문제가 없지만 우리말로 말하면 '죽일리'와 '죽이리'가 돼 어감이 않 좋다"며 개명을 희망했다.

1872년 청안현지도로 '院坪'과 '中里' 지명이 보인다.

그 결과, 행정명은 앞서 언급한대로 '죽리'와 '원평마을'로 바뀌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일제가 개명한 '죽리'(竹里)할 때의 '죽'(竹)이 과연 역사적인 사실성이 있느냐는 점이다. 이와 관련 한글학회가 간행한 『한국지명총람 3』 충북편(1970)은 '죽리'를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본래 청안군 남면의 지역으로서 남하리와 남차리의 중간에 있음으로 중리(中里) 또는 죽리(竹里)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모평리, 대수리, 비학리, 원평리, 서동 일부와 청주군 산외이면의 원경리 일부를 병합하여 죽리하 해서 괴산군 증평면에 편입됨.-<〃61쪽>

한국지명총람은 중리설, 죽리설 등 2가지를 제기했으나 확신이 잘 서지 않는지 어느쪽의 손도 들어주지 않았다.한말 흥선대원군은 서양열강이 물밀듯이 몰려오자 이른바 쇄국정책을 강화했다.

흥선대원군은 그 과정에서 전국 곳곳에 척화비를 세우고 또 지도를 제작, 전국 국방시설과 생산과 관련된 것을 소상히 파악하고자 했다. 이때 제작된 것이 이른바 <1872년 군현지도>이다.

이 고지도가 중리설과 죽리설 중 어느 것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되는가에 대한 답을 주고 있다. 당시 지금의 죽리 일대는 청안현 남면이었다. 1872년 군현지도는 당시 '里' 지명으로 원평(院坪), 중리(中里), 둔덕(屯德), 삼기(三岐) 등 13곳을 적었다.

1872년 군현지도는 중리를 '가운데 中' 자로 적었다. 이것이 정답이다. 본래 '중리'는 본래 남하리와 남차리 중간에 있다고 해서 작명된 지명이다. 그렇다면 일제가 작명한 '죽리'는 틀린 것이 된다.

당시 지도를 보면 '중리' 바로 옆에 '원평'이 위치한다. 지금은 종전 '죽1리'가 '죽리', '죽2리'가 '원평마을'로 불리고 있다. 원평마을에는 실제 조선시대 교통시설이었던 '원'(院)이 존재했다. 이 기회에 '죽리'도 '중리'로 개명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증평읍 홈페이지는 작자미상의 시를 게재해 놨다.

'마을 사이 있다 하여 중리(中里)라 부르고 / 출장 관원 숙식하던 원(院)집은 흑적없고 / 많은 길손 나들이 사거리는 여전한데 / 철마길이 되려가다 한촌(閑村)이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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