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곤이 진천으로 낙향을 꿈꾼 이유는

2014.09.11 16:23:26

조혁연 대기자

담헌 이하곤(李夏坤*1677-1724) 집안이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일대에 세거를 하기 시작한 것은 증조부 이시발(李時發·1569-1611)부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시발은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두타산 아래의 땅을 하사받았다.

이시발은 지금의 청주 오근장 출신으로, 서계 이득윤 밑에서 수학했다. 조부 이경억(李慶億·1620-1673)과 부친 이인엽(李寅燁·1656-1710)도 잇달아 급제, 벼슬이 좌의정과 대제학에 이르는 등 명문가 명성을 이어갔다.

이하곤의 부친 이인엽 영정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91호로 지정돼 있다.

이하곤은 1677년(숙종 3) 서울에서 부친 이인엽과 모친 임천조씨와의 사이에 3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담헌은 문중 농장이 진천에 있는 까닭에 서울과 진천을 자주 오르내렸다. 두타초 등 그가 남기 문집을 보면, 담헌은 그의 나이 25살, 29살 때 진천을 일시적으로 찾았고, 35살 때는 가족을 거느리고 하향했다.

담헌은 이때부터 초평 일대를 거주지로 삼았고, 완위각도 이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고 그가 서울 생활을 완전히 접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32세 되던 숙종 34년(1708)에 과거에 응시, 진사과에 장원 급제했다.

그러자 담헌에게는 '익위사세마', '세자익위사부솔' 등의 벼슬이 잇따라 제수됐다. 이는 가족은 진천 초평에 거주하고 있으나 담헌 자신은 관료생활 관계로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담헌은 두 차례의 관직을 모두 사양했고, 특히 '세자익위사부솔'에 임명된 때는 병을 핑계대고 사직하고 금강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정7품의 세자익위사부솔은 글자 그대로 왕세자를 보필하는 직책으로, '훗날'이 보장되던 자리였다.

담헌은 이후로 줄곧 선대의 장원(莊園)과 숨결이 남아있는, '진천으로 완전한 낙향'을 꿈꿨다. 그러나 담헌이 처음부터 진천으로의 낙향을 꿈꿨던 것은 아니었다. 친구 조구명(趙龜命·1693-1737)는 담헌을 생각하며 이런 글을 남겼다.

"경세제민을 스스로 기약하여 이미 治兵理財와 當世의 시무에 관한 군서를 박람하여 두루 통섭하지 않음이 없었고, 그 뛰어난 언변이 골짜기를 물이 터져 시내가 흐르는 것처럼 시원하고 거침이 없었다."-<동계집 중 담헌애사>

즉 담헌은 인품, 학문, 경륜, 문장을 두루 겸비한 무소부지(無所不知)의 박학(博學) 군자를 이상적인 정치가상으로 설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담헌은 복잡한 정치환경에 둘러싸여 있었다.

담헌 자신의 가문은 소론이고, 스승 김창협과 장인 송상기는 노론계였다. 뿐만 아니라 절친이자 문인화가인 윤두서(尹斗緖·1668-1715)는 남인계 집안이었다. 이 때문인지 그는 '세상이 어지러우니 참으로 출처가 어렵기도 하네(世亂方知出處難·두타초 제 2권)이라고 읊기도 했다.

1721년(경종 1) 신임사화가 일어났다. 소론의 지지를 받고 등극한 경종이 후사없이 위중해지자 노론계는 연잉군(후에 영조)을 세제로 책봉하자고 건의했다. 그러자 소론계가 반격을 가하면서 노론계 대신들이 대거 숙청된다. 여기에 장인 송상기도 포함돼 있었다.

1723년에는 김석홍이 스승 김창협을 헐뜯는 상소를 올리자 스승에 대한 변무소를 올렸다고 탄핵을 받았다. 그는 그해 진천 초평으로 최종적으로 낙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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