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에서

2014.09.16 13:32:04

방광호

청석고등학교 교사

병실 안이 조용하다. 창밖엔 소리 없이 비가 내리고 있다.

갑자기 거동이 부자연스러워진 어머니께서는 낙상(落傷)에 대한 자책과 자식들에게 가져다 준 불편함 때문인지 그간 잠을 이루지 못하시는 눈치였다. 오늘은 오랜 놀이에 지친 고단한 아이처럼 누워 계신다.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고 나오다 쓰러져 무릎 뼈에 금이 가 깁스를 하고 입원한 지 열흘쯤 되셨다. 나는 창밖으로 내리는 빗소리의 속삭임에 귀 기울인다. 비오는 날이면 습관처럼 떠올리던 육당의 시조를 읊조려본다.

가만히 오는 비가 낙수져서 소리하니 / 오마지 않은 이가 일도 없이 기다려져 / 열릴 듯 닫힌 문으로 눈이 자주 가더라//

고교 시절이었나·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일요일 오후였다. 대청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뭐하니?" 하는 작고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서울서 직장을 다니던 큰형이 어느새 대문을 지나 마당을 가로질러 마루로 올라서고 있었다.

"형… 왔어?" 느닷없는 형의 출현에 나는 그 짧은 인사조차 더듬었다. 그때 안방 문이 벌컥 열리며 마루로 뛰쳐나오시는 엄마의 다급한 목소리가 내 귀에 꽂혔다. "아이구, 얘야, 얼굴이 왜 그 모양이냐· 꼴이 왜 그래·" 아닌 게 아니라 형의 얼굴은 강말라 보였다. 내 눈과 귀가 미처 읽어내지 못한 형의 초췌한 모습을 문 닫고 들어앉아 계시던 엄마가 그 짧은 순간 형의 목소리만으로도 단박에 알아보신 것이다. 형은 힘없는 웃음으로 대신했다.

보름쯤 전부터 무얼 잘못 먹었는지 고열이 나고 두통이 오더란다. 감긴가 해서 약을 지어먹었는데 통 나을 기미는 보이지 않고 설사가 멈추지 않더란다. 병원엘 들렀더니 장티푸스라며 입원을 권하더란다. 서울에도 친척과 친지들이 있었지만 폐 끼치기 싫어 부모형제가 있는 집에서 치료를 받겠다고 내려온 길이란다.

왜 그랬는지 기억이 나지 않으나 형과 함께 쓰던 방이 형의 입원실이 되었다. 전염병이라는 이유로 형이 격리 수용된 셈이었다. 어려서부터 겁 많고 소심하던 나는 더럭 두려워졌다. 나는 책과 옷을 챙겨 안방으로 거처를 옮기며 길게 안도의 숨을 쉬었다. 엄마가 정성으로 끓인 미음을 형에게 가져다주라고 했을 때, 나는 엄마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전염병이라는데…!

잘 생기고, 운동 잘하고, 의협심이 강해서 언제나 친구들 앞에서 자랑하고 든든해하던 형인데 나는 그만 비겁하게도 무너져버렸다. 형을 향해 뻗던 손가락을 오므린 셈이었다. 그런데 털끝만큼의 두려움도 없이 먹을 것을 들고 형의 방으로 들어가고, 빈 그릇과 세탁물을 챙겨 나오는 엄마에겐 오로지 형밖에 없는 듯했다.

한 달 쯤 후, 형이 몸을 추스르고 나왔을 때 나는 형의 모습을 마주하며 얼마나 어색했던가. '형, 미안해. 그리고 나아줘서 고마워.' 내 진심이 전해졌는지 형은 밝게 웃으며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그때의 어머니께서 지금 빗소리에 몸을 맡기고 병실 침대 위에 고요히 누워 계신다. 왠지 얼굴에 그늘이 서려 보이는 까닭은 평생을 자식들을 위해 영일(寧日)이 없으셨던 어머니에게 아직도 무슨 걱정이 남아있는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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