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곤, 중국 그림까지 소장하고 있었다

2014.09.23 15:58:06

조혁연 대기자

두타초 책 14에는 '題李一源所藏鄭선元伯輞川渚圖後'(제이일원소장정선원백망천저도후)라는 글이 실려 있다. 이와 관련, 이하곤(李夏坤·1667-1724)과 친구 신정하(申靖夏·1681-1716)가 주고 받는 말로 먼저 이하곤의 말이다.

'내가 어려서부터 그림을 좋아하는 병이 있어 남의 집에 소장된 것도 반드시 내가 모아둔 후에야 그쳤소. 근래 그렇지 못하였으니 기호가 이미 쇠퇴했다고 생각했소.(…) 내 집의 완위각에 단지 수 십 폭의 옛그림이 있는데 근래 제인의 필적은 가지고 있는 것이 전혀 없으니….'

이에 대해 친구 신정하는 '그림을 많이 소장하고 있느데 또 욕심을 내면 탐욕스러운 것'이라는 투로 답한다.

'재대가 수장한 것이 어찌 많지 않겠습니까. 거두어 진천으로 돌아갈 때에는 수레에 실음 서화가 꼬리를 물고 길에서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 그런데도 이제 이 화첩에 대해 틈새를 보며 갖고자 하는 생각이 있으니 이것은 참으로 많이 있으면서도 더욱 욕심을 내는 자입니다.'

인용문 중에 '이 화첩'이라는 표현, 제목 중에는 '鄭선元伯輞川渚圖後'라는 내용이 보인다. 바로 이 대화는 겸재 정선(鄭··1676∼1759)의 '輞川渚圖'라는 그림을 둘러싸고 이하곤이 '꼭 구입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추자, 신정하가 '그것은 탐욕이다'라고 공박하는 내용이다. 인용문의 '재대'는 이하곤의 자이다.

중국화가 문동의 묵죽도.

그 그림 속에는 중국 문인화가 문동(文同)이 그린 '묵죽도'(墨竹圖)도 있었다. 이하곤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던 이유원(李猷遠·1695-1773)은 '임하필기'에서 이런 글을 남였다.

'만권루 안에 옛날 두루마리가 하나 있는데 비단 바탕이 벗겨지고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필획 속의 신운은 분간하기 어려우나 줄기에서 바람소리가 들리는 듯한 데다가 완연한 서릿발 속에서도 굽히지 않는 자태를 갖추어 우리나라 사람의 화법과는 매우 다르다. 문여가의 유적이라고 하는데 중국 사람들은 모두 이 화법을 모범으로 삼는다고 한다.'

'문여가'가 바로 문동이다. 그는 지금도 중국에서 묵죽도, 그중에도 '바람에 나부끼는 묵죽도'를 가장 잘 그렸다. 우리나라에서는 문인화가 이정(李霆·1554∼1626)이 묵죽도를 가장 잘 그렸다는평가를 받고 있다. 두 사람의 그림은 비슷한 느낌을 풍긴다.

이정구(李廷龜·1564∼1635)는 그런 이정의 묵죽도를 "소동파의 신기와 문동의 사실성을 갖췄다"라고 비평했다. 이정구가 말한 '문동'이 바로 이유원이 언급한 '문여가'다. 당시 이하곤은 중국 화가 문동의 그림도 소장하고 있었다.

이하곤의 지인 중에 조구명(趙龜命·1693-1737)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조부 조상우가 영의정에 오를 정도의 소론계 명문가였다. 그러나 과거시험 때 시험관이 문제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시험지를 빼버리자 이후 과거에 전혀 응시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그가 담헌이 졸하자 '담헌애사'에서 이렇게 추억했다.

'이윽고 큰 술잔을 들어 마시고는 웃으며 말씀하였다. "한 구역의 자연을 내가 멋대로 가지고 수백 축의 도서를 내가 소장하고 있네. 내 장차 여기서 늙을 것이니, 그대는 나귀 한 마리 타고서 들러 문주회를 열 수 있겠는가."'-<동계집 권9>

문주회는 선비들이 글을 지으면서 술을 마시는 모임으로 과거에 합격했으면 '선생(先生)', 그렇지 않았으면 '대인(大人)'이라고 호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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