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청주읍성의 거리 풍경을 읊다, 이하곤

2014.09.30 15:36:14

조혁연 대기자

이하곤(1677-1724)의 장인 송상기는 대제학, 대사헌, 예조·공조판서 각 1번 그리고 이조판서를 무려 5번이나 역임하는 등 숙종대 권력의 정점에 있던 인물이다. 특히 그 전에 충주목사, 충청도관찰사 때 선정을 베푸는 등 우리고장과도 인연이 깊은 인물이다.

'충주목사 송상기(宋相琦)가 상소하여 백성의 일의 절급(切急)한 상황을 진달하고 청하기를, "한전(旱田)에 급재(給災)하고, 적곡(·穀)을 거두는 것은 3분의 1을 율(率)로 하며, 갑술년8709) 이전의 포흠은 한결같이 모두 탕척하고, 양진창(楊津倉)의 적곡은 전미(田米)로써 대봉하며…"'-<숙종실록 21년 9월 1일자>

양진창은 충주읍성 북문 부근에 존재했던 국립창고를 말한다. 그러나 그는 신임사화 때 화를 입어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됐다. 경종(장희빈의 아들)의 건강이 악화되자 누구를 후계자로 옹립할 것이냐를 둘러싸고 소론과 노론 사이에 격렬한 충돌이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소론이 "노론이 왕권교체를 기도한 역모를 하고 있다"고 공격, 김창집·이이명·조태채·이건명 등 노론계 대신들이 대거 축출됐다. 이른바 신임사화로, 여기에는 이하곤의 장인 송상기도 포함돼 있었다.

이하곤은 장인 송상기가 당시 67살 노구의 몸으로 강진에 유배되자 빨리 배소를 방문하고자 했다.

이하곤은 진천에서 장인 유배지인 전남 강진을 갈 때 청주읍성 본관(근민헌)에서 묶었다. 18세기 전반에 제작된 해동지도.

"주막은 짙은 연기에 밤빛은 그윽하고 / 등불 앞에 크게 한숨 쉬며 근심 말하네. / 강진은 응당 하늘처럼 멀지 않으니 / 내 걸음 빨리하여 가을에 찾아뵙겠나이다.'-<두타초 책9>

담헌이 이런 다짐을 행동으로 옮긴 것은 장인 송상기가 돌아가기 1년 전인 1772년 10월이었다. 13일 초평을 출발한 담헌은 같은 날 청주에 도착했고, 당시 청주목사는 정혁선(鄭赫先·1666-1733)이 담헌을 맞았다. 그는 우리고장 음성현감도 역임했던 인물로, 당시 동헌인 근민헌(近民軒)에 묵게 했다.

여지도서에는 '근민헌 목사정당 십칸'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목사가 근무하는 집으로 10칸이라는 뜻이다. 정혁선이 이처럼 큰 공간을 민간인에게 숙박장소로 제공한 한 것은 담헌의 명문가적 배경을 다분히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담험은 청주의 번창함을 보고 크게 놀랐다.

'화려한 집들 좌우에 늘어서 있고 / 온갖 잡화 밤낮없이 유통되네. / 비단옷 입은 사람 곳곳에 있고 / 북치고 나팔 불며 즐거워하네. / 도회의 번화함 성대하니 / 예로부터 살기 좋은 곳이라 일컬어졌네.'-<두타초 책9>

이하곤은 문의-회덕-논산-여산 등을 거쳐 23일이 지난 11월 6일이 강진에 도착했다. 이 코스를 택한 것은 회덕에는 처가, 논산에는 누이(妹)의 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장인 송상기를 뵙고 귀로에 전남 담양의 소쇄원에 들렸다.

'서봉사 기슭에서 저녁 종소리 들리는데 / 소쇄원 속에서 지팡이 짚고 서성이네 / 푸른 솔빛은 항상 바위 폭포에 그늘지고 / 계곡물은 멀리 대숲 속 연못으로 들어가네 /…/.'-<소쇄원에서>

소쇄원은 1530년(중종 25) 조광조의 제자 소쇄옹 양산보(梁山甫·1503-1557)가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건립한 정원으로, 얕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각 건물이 지어져 있어 자연과 인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조화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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