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무아래 장군'이라는 소리를 들을까, 충주 이수일

2014.10.14 13:44:02

조혁연

우리고장 충주 출신인 이수일(李守一·1554∼1632)은 비교적 늦은 29살에 무과에 급제했다. 이후 그는 밀양부사, 경상좌도수군절도사, 남도병마절도사, 길주목사겸 방어사, 평안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하는 등 무관의 요직을 섭렵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임진왜란 초기전투(예천·용궁)를 제외한 야인토벌과 반란군 진압 등의 싸움에서 대부분 승리를 거뒀다. 특히 그는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평안도병마절도사겸 부원수를 겸해 길마재(鞍峴)에서 반란군을 무찌르고 한성을 수복, 그 공으로 진무공신 2등과 계림부원군에 봉해졌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을 논할 때 그 실체를 '솔선수범'이라고 말하는 전문가들이 매우 많다. 이수일 장군이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데도 분명히 그만의 리더십이 작용했다.

현존하는 여러 문집이나 관찬자료 등에는 이수일 장군의 생전 행적을 읊은 시들이 적지 않게 등장하고 있고, 그 리더십의 공통점은 여러 곳에서 인(仁), 즉 '어짐'으로 표현돼 있다.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 중 한 명으로 계곡(谿谷) 장유(張維·1587-1638)가 있다. 그는 시문집 '계곡집'(谿谷集)을 남겼고, 그 안에 '계림부원군 이수일에 대한 만시'(鷄林府院君李守一挽)라는 오언율시가 수록돼 있다.

'복덕을 구비한 뛰어난 장수(福將兼名將) / 장단의 그 모습 얼마나 호걸스럽던가(登壇幾箇豪) / 모두가 인정한 건강한 장수 체질(共稱龜鶴壽) / 육도삼략을 마음대로 구사했네(仍擅虎龍韜) / 한 나라 각신(閣臣) 영평처럼 중망을 얻고(漢閣營平重) / 당 나라 훈신 곽령처럼 그 공훈 드높았지(唐勳郭令高) / 어느날 별 하나 떨어지던 밤(星芒一夕隕) / 어쩜 그리 대수(大樹)가 소조(蕭條)하던지(大樹獨蕭騷).'-계곡선생집 제 29권>

인용된 시에는 이수일의 '어짐 리더십'이 언뜻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나 그렇지 않다. 시 말미의 '어쩜 그리 대수가 소조하던지'가 그의 어짐 리더십을 웅변하는 표현이다.

후한서는 후한 광무제 때의 장수 '풍이'(馮異)를 다루고 있다. 그는 전투에서 승리한 후 공을 서로 자랑하는 여러 장수와 달리 홀로 큰 나무 아래 물러가 있곤 하였다. 따라서 당시 군중(軍中)에서 그를 대수장군(大樹將軍)이라고 불렀다는 고사가 전한다.

대수, 즉 큰 나무 아래 혼자 있는 장군이라는 뜻으로 이수일도 그러했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정묘호란 척화파로 유명한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1570-1652)이 있다. 그도 이수일에 대한 만시를 남겼고, 여기에도 '나무아래'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당대에서 여러 장수 논할 적이면(當代論諸將) / 공이 홀로 무리 중에 뛰어났다네(惟公獨出群) / 칼날 뽑아 먼저 적을 격파했으나(推鋒先破賊) / 나무 아래 쉬며 공을 말 아니했네(屛樹不言勳).'-<청음집 제 4권>

충주 금가면의 이수일 신도비와 사당.

그가 졸한 후 국조인물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인(仁)으로써 위엄을 삼고 의리로써 용기를 삼아 사랑이 넉넉하면서도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공을 이루었다'라고 적었다. 이수일 신도비와 묘소 그리고 사당 충훈사는 우리고장 충주시 금가면 오석리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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